33년 연기 인생 정진영의 첫 감독 데뷔작 “나만큼은 새롭고 이상한 걸 해야 했다”
영화 ‘사라진 시간’에서 배우 조진웅은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사라진 ‘형사로서의 삶’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형구 역을 맡았다.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영화 ‘사라진 시간’은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발생한 외지인 교사 부부의 의문의 화재 사망 사고를 조사하던 형사 ‘형구’(조진웅 분)가 하루아침에 삶이 송두리째 뒤바뀌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집도, 가족도, 직업도 내가 알던 모든 것이 사라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관객은 ‘형구’가 자신이 기억하는 삶을 되찾기 위해 펼치는 추적극을 따라가게 된다.
포스터의 조진웅을 떠올리며 영화를 마주했다간 초반 10여 분 가량을 당황하며 보내게 될 것이다. 분명히 조진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의 티켓을 발권한 것 같은데 초면인 분들이 나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연극의 한 판을 벌인다. 당황한 나머지 내가 뽑은 티켓이 ‘사라진 시간’의 것이 맞는지, 그럼 지금 스크린에 등장하는 이들은 누구인지 티켓과 스크린을 번갈아가며 확인하기에 지칠 무렵에 드디어 조진웅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의 등장으로 영화는 색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주연인 조진웅은 영화 시작 후 약 10여 분 가량 뒤부터 등장한다. 그의 등장으로 영화의 색과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곳의 주민들의 어투나 행동, 대사는 마치 극중극을 보는 것처럼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비밀을 간직한 이들이 평정을 가장하기 위해 꾸민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오히려 이 배경 안에서는 그들이 정상이고 ‘형구’의 모습이 비정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주변 인물들의 연극적인 대사와 행위가 이어지는 와중에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조진웅 특유의 적절한 코믹함과 애드립은, 역설적이게도 이 무대 속에서 ‘형구’가 결코 섞여들 수 없는 이방인이자 타인임을 더욱 명확하게 만들어준다.
‘사라진 시간’에서 형구는 두 가지의 모습으로 분한다. 하나는 숨진 교사 부부의 사건 수사를 맡은 형사로, 또 하나는 이 마을의 교사로서의 모습이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공범인양 감추고 있는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는 너무나도 미심쩍은 수법으로 술에 취하게 되고, 이 날을 기점으로 그의 삶이 송두리째 뒤바뀐다. 형사로서 살아왔던 최소 15년의 세월은 사라지고 나의 아내와 두 아들조차 온데간데없이 총각 교사로서의 새로운 삶이 주어진 것. 심지어 교사인 그가 살고 있다는 집은 앞서 숨진 교사 부부가 살던 집이다. 화재로 시꺼멓게 그을려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어야 할 집은 감쪽같이 원상 복구 돼 있고 그 집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도 오직 형구뿐이다.
1988년 데뷔 후 33년 연기 인생을 걸어온 배우 정진영은 ‘사라진 시간’으로 감독에 데뷔했다.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결말에 이르면서도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또 어디서부터 미쳤거나 제정신이었는지를 영화는 결코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렇게 애매와 모호 사이를 넘나들다가 마지막엔 무 자르듯이 뎅겅하고 칼자루를 놔 버리는 게 ‘정진영 감독’의 스타일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정진영 감독’이 가리키고자 했던 방향은 실제론 어땠을까. 9일 서울 광진구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점에서 열린 ‘사라진 시간’ 언론배급시사회에 참석한 정진영 감독은 작품에 대해 “기존의 어법이나 규칙을 생각하지 않고 자유롭게 끌고 가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사실 영화 연출을 다시 해보겠다 마음을 먹은 뒤 먼저 썼던 시나리오는 버렸다. 그 안에 나도 모르게 익숙한 관습들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세상에 많은 이야기들과 훌륭한 감독들이 있기에 나만큼은 새롭고 이상한 것을 해야 그나마 내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영화를 보며 ‘낯설게’ 느낄 관객들에게는 “눈치를 보지 않고 (영화를) 하고 싶었다. 내 영화는 그런 낯섦이 장점이자 강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그의 말대로 ‘사라진 시간’은 상업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느낌표보다 물음표를 더 많이 나눠줄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거나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점부터는 무난하고 부드럽게 섞여 들어간다. 그리고 이 지점에는 조진웅이 솟대처럼 서 있다. 실험적인 측면이 다른 것보다 우선적으로 부각될 수 있을 작품에 영 익숙해지지 않을 관객들을 홀린 듯이 이끄는 것도 조진웅이라는 배우가 가진 힘 덕일 것이다.
한편 ‘사라진 시간’은 화재 사망 사건의 수사를 위해 시골 마을에 온 형사 ‘형구’(조진웅 분)가 조사를 진행하던 어느 날 아침, 사건이 벌어진 교사 부부의 집에서 깨어나면서부터 집도, 가족도, 직업도 기억하는 모든 것이 송두리째 사라져 이를 되찾기 위한 추적에 나서는 미스터리 스릴러 무비다. 33년 연기 인생을 걸어온 배우 정진영의 첫 감독 데뷔작으로 먼저 눈길을 끌었다. 여기에 더해 묵직하게 극을 이끌어가는 조진웅의 무게감을 다시 한 번, 소름끼칠만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기회. 105분, 15세 이상 관람가. 18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