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연 키즈니 정병국 키즈니 편 가르기보다 모두 만나 우리만의 이야기 뽑아내는 게 우선”
김재섭 위원. 사진=이종현 기자
미래통합당 공천을 받아 서울 도봉구갑 선거구에 도전했던 김재섭 위원은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총선이 끝난 뒤 김 위원은 ‘김종인 비대위’로 발탁되며 이목을 끌었다.
김재섭 위원은 김종인 비대위원장으로부터 특명을 받았다고 한다. 20~30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당내 청년 활동 체계를 만들고 청년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과 함께 청년 콘텐츠를 개발해달란 명이었다. 무엇보다 김 위원의 최우선 과제는 여러 의혹, 내홍 등으로 조각난 당내 청년 조직을 재건하는 일이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미래통합당 청년 조직은 뿔뿔이 흩어진 상태다. 새누리당과 자유한국당 시절 구성됐던 청년 조직은 바른정당계의 탈당 및 통합 과정에서 분열됐고 또 새로운 인물이 영업되는 과정에서 갈등이 쌓였다. ‘굴러온 돌’ 김재섭 비대위원이 ‘완장’을 찬 것을 두고 불만들이 새어나오는 배경이다. 자연스레 김 위원을 향한 검증의 칼날도 들어온다.
사실 미래통합당 청년 조직 안에서 김 위원에게 쏟아진 의혹의 눈초리는 한두 개가 아니다. 일단 정치 참여 의도 시비가 붙는다. 그는 정치를 시작하며 “법학을 진부하게 느꼈다. 법조계보단 실물 경제에 관심이 많았다”며 “스타트업을 운영하다 규제 철폐의 필요성을 느껴 정치를 하게 됐다”고 했다.
2006년 수시로 서울대 사회과학계열에 입학해 법대로 전과한 그는 2014년 대학 졸업 뒤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1차 합격을 했다. 이런 경력이 알려지자 “법학을 진부하게 느꼈다”는 인터뷰 발언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스타트업 ‘레이터’를 운영한 것도 1년 남짓이었다. 스타트업은 아직 서비스 출시를 못했다. 법학에 대한 심경과 스타트업 경험 등 ‘팩트’ 자체가 틀린 건 아니지만 일부 경력을 부풀린 것 아니냐는 뒷말이 나온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법대 전과에는 부모님 영향이 컸습니다. 그 길로 가려 했던 것도 맞습니다. 근데 언젠간 말하겠지만 대학 졸업 때쯤 집안에 큰일이 생겼습니다. 장남이라 생업 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때 법학전문대학원 진학은 비용 면에서 사치였습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고 당시 만난 귀인 임승찬 대표의 회사에서 일하다 사내 벤처 형태로 스타트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임 대표가 가진 특허를 실물로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레이터 사무실 전경. 김재섭 위원에겐 정치권 편입용 기획 창업 의혹이 따라 붙었다. 일요신문이 직접 찾았다. 레이터가 위치한 건물 3층에는 ‘미압(miab)’이란 간판이 섰다. 미압은 김재섭 위원이 이끌던 레이터의 애플리케이션(앱) 이름이다. 레이터는 임승찬 대표의 회사 제노프릭스 안에 사내 벤처로 있었다. 사진=최훈민 기자
김 위원은 어떤 언론에선 스타트업 운영책임자로, 어떤 언론에선 대표로 소개됐다(관련기사 이력 부풀리기·사업비 증빙 잡음…통합당 청년 비대위원들의 민낯). 그는 “등기상 대표는 임승찬 대표였다. 사내 벤처인 레이터는 내가 책임지고 맡아서 했다. 그래서 서류상은 아니지만 내가 레이터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임 대표는 내가 레이터를 운영하며 다른 일도 마음껏 할 수 있게 멍석을 깔아주신 고마운 분”이라고 했다. 이어지는 김 위원의 말이다.
“그때 뭘 가릴 상황이 아니었어요. 이 일 저 일 다 했어요. 진짜 너무 힘들었어요. 서울대 법대 나왔는데 저만 초라한 인생을 사는 거예요. 친구나 동기는 다 사법시험 패스하고 로스쿨 가는데 저만 아무것도 아닌 상태였거든요. ‘쟤들은 다 잘되는데 나는 서울대 법대 나와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도 이런 이야기 어디에서 잘 못해요.”
이때 상황이 그에게 있던 정치 욕구를 불타오르게 했다.
“돈을 빨리 많이 벌어야 하니까 정해진 직장만 한 곳 다니는 것보다 유연성 있는 많은 일이 여러 개 필요했어요. 근데 그런 일자리가 별로 없더라고요. 왜 유연하고 돈 많이 주는 일자리가 적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초적인 사회 구조를 타고 올라가다 보니 문제의 핵심이 드러났어요. 노조 문제가 가장 심각하고 일자리 문제에 있어 원흉이라고 봤어요. 한국 사회는 노조가 꽉 잡고 있는 그 구조를 탈피하지 못하면 유연성도 좋은 일자리도 선순환이 불가능한 구조가 돼버렸어요. 이걸 꼭 바로 잡겠다 이를 꽉 물었죠.”
김재섭 비대위원에게 “쉽게 가지 굳이 왜 그 고생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말했다. “그게 맞으니까요.” 사진=이종현 기자
어릴 때부터 학생회장 등을 해오며 정치인의 꿈이 늘 마음 한편에 있었던 그에게 2016년 조우한 청년인재양성소 ‘건명원’은 큰 그림을 가슴에 품는 기회가 됐다. 몇 번 나가지 않았지만 김세연 전 의원, 정병국 전 의원 등이 만들었던 청년정치학교 역시 좋은 인연의 끈이 됐다. 하지만 김 전 의원과 정 전 의원 ‘키즈’라는 이야기는 기존 청년 조직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이유이기도 했다.
“청년 조직 사이에서 누구는 김세연 키즈, 누구는 정병국 키즈, 누구는 황교안 키즈 이런 말 많잖아요. 덮어씌운 프레임이 매우 많아요. 지금 중요한 건 일단 모두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한 번 제대로 말해 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굴러온 돌인 것도 맞고 낙하산이지만 일단 모두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싸움도 하고 전쟁도 치르면서 우리만의 이야기를 뽑아내는 게 우선이라고 봐요. 우리끼리 싸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무언가를 이기고 넘어서는 게 중요하잖아요.”
김 위원은 최근 당내 ‘좋은 청년’으로 구성된 모임을 만들어 보려고 백방 뛰고 있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아는 게 아직 많지 않다. 당의 생리도 잘 모른다. 다만 우직하게 비대위가 잘 굴러갈 수 있도록 계속 뛰어볼 거다. 많이 부딪히고 깨지더라도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 좋은 나라 만들기를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청년들이 정치를 한다고 하면 소위 ‘업자’들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청년들을 통해 정치적 이득을 얻고자 하는 정치 브로커다. 청년들이 창당 기초 조건인 5000명 모으기가 쉽지 않은 것도 이들이 활개를 치는 이유 중 하나다. 김재섭 위원도 “창당 조건 만들어 주겠다”는 제안들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 위원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그가 이끌었던 청년 조직 같이오름에는 “한 명씩 모두 만나 입당 원서를 받자”는 취지의 강령이 있었다. 그는 3000명을 넘게 설득, 입당 원서를 받은 뒤 미래통합당에 합류했다. 쉽게 가지 굳이 왜 그 고생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말했다. “그게 맞으니까요.” 그게 맞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