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왕의 남자’ 불러들여라
▲ 이재오 권익위원장. 임영무 기자 |
최근 청와대를 중심으로 하는 여권 핵심부는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을 차기 당 대표 후보군 중 가장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개헌·4대강사업·세종시 수정안 등 산적한 현안 처리를 위해서는 추진력과 충성심이 이미 검증된 이 위원장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만약 여권 핵심부의 구상대로 이 위원장이 대표직에 오르게 되면 지난 5월 4일 원내대표로 추대된 김무성 의원과 함께 한나라당 ‘투 톱’을 이루게 된다. 한때 친이-친박계 좌장으로 불리며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댔던 이 위원장과 김 의원이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여권 주류가 지난 3월 말부터 준비해온 것으로 알려진 ‘이재오 대표-김무성 원내대표’ 시나리오의 진위 여부 및 실현 가능성을 따라가 봤다.
“이래서는 다음 대선을 어떻게 치러야 할지 고민이다.”
지난 5월 3일 한나라당 서울시장 경선이 끝난 직후 청와대 정무라인의 한 관계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친이계 핵심들이 나경원 의원을 밀었지만 오세훈 시장이 압승을 했다. 지난해 7월 서울시당위원장 선거에서 주류가 밀었던 전여옥 의원이 친박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았던 권영세 의원에게 패한 것과 비슷하다”면서 “대선이 다가올수록 박근혜 전 대표로의 쏠림 현상은 더욱 심해질 텐데 큰일이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수도권의 한 소장파 의원 역시 “지금의 여권 주류는 지난 대선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그때와는 백팔십도 다르다. 이러다보니 박 전 대표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친박과 붙어서 이기려야 이길 수가 없다. 대대적인 쇄신이 필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올해 초부터 여권 내에서 이러한 지적이 끊이지 않자 청와대가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고 한다. 지난 2월 정두언 남경필 의원 등 친이계 소장파가 지방선거 전면에 나서게 된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는 전언이다. 정권 창출에 큰 기여를 하고도 집권 초기 ‘파워 게임’에서 밀려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소장파들을 중용해 변화를 꾀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는 불만을 품고 있던 ‘공신’들에게 다시 기회를 줌으로써 내부를 다독거리기 위한 것으로도 받아들여졌다. 앞서의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일단은 내부 진영부터 재정비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 때문에 정두언 의원 등에게 중책을 맡긴 것이다. 또 대선에서 그들이 주로 실무를 맡았기 때문에, 지방선거에서도 잘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어찌 됐건 소장파로서는 다시 정치권 중심에 들어오는 계기가 됐던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 핵심부는 이 무렵 차기 당 지도부 구상에도 나섰다. 당시 청와대와 한나라당 지도부 사이에서는 원내대표로 김무성 안경률 이병석 이주영 의원이, 대표로는 안상수 정몽준 의원 김형오 국회의장 이재오 위원장 등이 물망에 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일각에서는 당내여론 수렴과 자체 분석 등을 통해 이 가운데 ‘이재오 대표-김무성 원내대표’ 안을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우선 4월에 김 의원을 원내대표로 임명한 뒤,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전당대회에서 이 위원장을 당 대표로 적극 지지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세웠다는 것. 이러한 내용은 보고서로도 만들어져 청와대 고위층에게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보고서 작성에 깊숙이 관여한 청와대 관계자는 “안상수-안경률, 이재오-이병석 등 여러 조합이 검토됐다. 그 결과, 이재오-김무성 조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친박과 친이 좌장의 만남 자체만으로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고, 또 시너지 효과도 가장 클 것으로 내다봤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김무성 의원은 지난 5월 4일 여권 주류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원내대표로 합의 추대됐다. 이 과정에서 이 대통령의 의중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정가에서 익히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이 위원장의 당 대표 출마 여부. 이에 대해 여권 내에서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이 위원장이 전당대회 혹은 은평을 재보선 중 어느 한 곳을 택할지에 대해 아직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어 여러 관측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위원장을 잘 아는 지인들은 청와대에서 강력한 요청이 올 경우 그가 재보선을 포기하고 당 대표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 이명박 대통령(오른쪽)과 김무성 원내대표. |
여권 일각에서는 최근 청와대가 소장파의 지방선거 전략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점을 거론하며 이 위원장의 대표 출마를 점치고 있기도 하다. 지난 2007년 이명박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한 전직 고위 관료는 “천안함 침몰, 야권단일화 등 주변 환경이 아무리 여권에게 불리하다고는 하지만 현재 (선거) 상황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게 청와대의 판단이다. 친박과의 관계에서 소장파가 서툴게 대처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 것으로 안다. 만약 소장파가 지방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있다면 청와대가 계속 그들을 데리고 갈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이재오 아니겠느냐”고 털어놨다.
소장파와 함께 친이계의 또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이상득 의원 파워가 약화됐다는 점도 이 위원장 대표설에 힘을 보태고 있다. 정권 출범과 함께 ‘만사형통’(모든 일은 형님으로 통한다)이란 신조어를 낳을 정도로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이 의원은 지난해 2선 후퇴를 선언한 후 최근엔 자원 외교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비록 이 의원 측근들이 여전히 청와대 및 정부부처 요직에 포진하고 있긴 하지만 그들 역시 각종 구설에 끊임없이 오르내리고 있어 그 운신의 폭이 예전만 같지 못하다는 평이다. 집권 후반기 레임덕이 불가피한 이 대통령으로서는 이 의원 라인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대목이다.
이런 배경에서 보면 이재오 위원장의 당 대표 출마는 청와대의 ‘대안 부재’와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현 정권을 굴리는 세 바퀴 중 남은 카드가 이 위원장뿐이라는 것이다. 한나라당 중도성향의 한 중진 의원은 “이 의원이 은평을에 나간다고 해서 당선된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 만약 떨어지면 이 위원장 개인의 정치적 생명은 차치하고, 이명박 정부도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이 바닥에 달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재보선보다는 당 대표에 출마하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가에선 이 위원장이 당 대표가 아닌 재·보선에 나갈 것이란 관측도 만만치 않다. 그동안 본인 스스로가 지역구 당선을 통한 국회 입성에 강한 의지를 비쳐왔기 때문이다. 또한 친박이 이 위원장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점도 이 위원장의 대표 출마 가능성을 낮게 보는 이들의 근거 중 하나다. 굵직굵직한 현안을 앞두고 친이 주류가 굳이 친박과 대립각부터 세울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여권 일각에서는 2년 넘게 정치권 중심에서 떨어져 있던 이 위원장이 대표가 된다 하더라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이 위원장의 대표 출마에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한나라당의 한 친이 의원은 “한 번 권력에서 멀어지면 다시 회복하기란 사실상 힘든 게 정치 속설 아니냐. 더군다나 원내가 아닌 원외 대표는 더 많은 한계가 있다. 우선 지역구 선거에 나가 금의환향한 뒤, 차차기 대표를 맡는 것을 고려해 봐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안팎에서 이 위원장의 당 대표 출마설은 점점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여의도연구소 등 자체 여론조사 결과 은평을 재보선에서 이 위원장 승리가 불투명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 이 위원장의 한 측근은 “재보선 이외엔 고려해보지도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이라면서 “사실 권익위원장도 원해서 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청와대도 비록 이 의원의 당 대표 선출에 많은 장애물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김무성 원내대표 카드 역시 당초 내부에서 여러 잡음이 들렸지만 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 해결한 바 있다. 한 친박 의원은 “최근 이 위원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해 박 전 대표에게 화해 제스처를 취한 것을 보면서 당 대표에 도전할 뜻이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 위원장이 대표를 맡으면 친박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이란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