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도 버거운데 재무약정 부담까지?
▲ 현대그룹과 범현대가 사이 현대건설 인수전이 예상되고 있다. |
‘재무약정’이란 부실 우려가 있다고 여겨지는 기업집단이 경영 정상화를 위해 채권은행과 양해각서를 맺는 것을 뜻한다. 현대그룹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은 ‘재무구조 평가를 통해 현대그룹이 구조조정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향후 부실 우려가 있다’는 예비 판정을 내려놓은 상태다. 만약 재무약정 대상으로 최종 결정될 경우 현대그룹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 등 자구책을 마련해야 한다.
채권단이 현대그룹을 재무약정 후보 리스트에 올려놓은 이유는 그룹 총자산의 80%를 차지하는 현대상선의 지난해 실적 저하에 있다. 현대상선은 지난해 8000억 원의 당기순손실(적자)을 기록했다. 현대상선은 지난 2008년 6700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지만 지난해엔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해운업 불황 여파를 이겨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재무약정 후보 선정 소식이 알려지면서 현대그룹은 계열사 주가 하락 등 만만치 않은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현대 측은 곧바로 현대상선 올 1분기 실적 발표를 통해 분위기 반전에 나섰다. 현대상선은 지난 4월 29일 보도자료를 통해 “올 1분기 흑자를 달성해 ‘턴어라운드’(실적 반등)에 성공했으며 4월 한 달 영업이익은 사상 최고였던 2008년 월평균 영업이익 489억 원을 상회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지난해 글로벌 경기 여파로 적자 상태에 놓였던 현대상선이 이렇듯 단기간 내에 흑자 전환된 것에 대한 각계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현대상선 턴어라운드에 대해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의 긍정적 평가가 따르는 가운데 과연 현대그룹이 재무약정 대상으로 선정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5월 말까지 결정 여부가 드러날 것이라고 전해지지만 지난해 다른 기업집단에 대한 재무약정 심사의 경우 한 달 넘게 시간을 끈 적도 있어 ‘5월 내 결정’이라 단언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현대 측은 “채권단이 결정하는 것이니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룹 주력인 현대상선이 턴어라운드를 기록함에 따라 재무약정 체결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 기대하는 듯하다.
일각에선 현대그룹이 재무약정 후보군에 오른 이유 중 하나로 대북사업 중단에 따른 신인도 하락을 꼽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 측은 “말도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룹 관계자는 “그룹 총자산에서 1% 정도를 차지하는 현대아산 때문에 그룹 전체가 흔들린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할 정도다. 이 관계자는 “아직 재무약정이 결정된 것도 아니고 설사 재무약정을 맺는다 해도 기업이 망할 정도의 위기에 처하는 것은 아니다”고 역설했다. 재무약정이 결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현대그룹 재무상황에 대한 억측들이 불거지는 데 대한 당혹스러움을 표현한 것이다.
▲ 왼쪽부터 현정은 회장, 정상영 명예회장, 정몽준 대표. |
현대그룹 주력 계열사들의 실적 부진이 부각되는 동안 ‘범 현대가 기업들 간에 현대건설 인수를 위한 물밑 교감이 오가고 있다’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는 지난해 현대중공업이 현대종합상사를 인수하면서 ‘현대건설 인수를 통한 옛 현대가 재건’ 가능성이 고조된 까닭에 등장한 시각이기도 하다.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의 현대중공업은 현대건설 인수 후보로 줄곧 거론돼 왔지만 지난해 현대종합상사 인수에 이어 현대오일뱅크 인수까지 추진 중인 데다 조선경기 불황으로 자금이 넉넉지 않을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까닭에 현대중공업 대신 정상영 명예회장의 KCC가 현대건설 인수 선봉에 설 가능성이 제기된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동생인 정상영 명예회장은 지난 2003년 현대그룹 계열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사들이면서 현정은 회장과 그룹 경영권 다툼을 벌인 이른바 ‘시숙부의 난’ 주역이다.
범 현대가 기업들은 그동안 현대건설과 관련해 “관심 없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그런데 이들이 현대건설 인수전을 앞두고 사외이사 선임을 통한 외연 확대에 나서 눈길을 끈다. KCC는 지난 2월 26일 정기 주주총회를 통해 권오승 전 공정거래위원장을 새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기업결합(M&A) 심사를 하는 기관이다.
현대중공업 계열인 현대미포조선은 지난 3월 12일 정기 주총을 통해 이병주 전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을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이 고문은 공정위에서 경쟁국 정책국 조사국 독점국 등의 국장을 거쳐 상임위원(1급)까지 지낸 인물이다. 같은 날 현대중공업도 정기 주총을 통해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와 금융감독원 제재심의의원을 지낸 송정훈 법무법인 충정 변호사를 새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이에 질세라 현정은 회장도 정치적 외연 넓히기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지난 3월 24일 현대그룹은 장경작 전 롯데그룹 호텔부문 총괄 사장을 현대아산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했다. 장 사장은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이명박 대통령과 대선후보 시절부터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다. 이 대통령과 동문인 장 사장을 통해 정부와 보조를 맞춰 북한과의 우호적 관계를 도모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정부의 입김을 배제할 수 없는 현대건설 인수전에 대비한 포석이란 해석도 따른다. 이에 현대 측은 “(장 사장의) 경영 노하우를 높이 산 것일 뿐 정치적 배경은 없다”고 밝혔다.
현정은 회장은 올해 신년사를 통해 “현대건설 인수는 그룹의 미래를 위해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북사업 중단에 이은 재무약정 논란과 범 현대가의 견제 등 난관을 뚫고 그룹의 안정과 현대건설 인수 교두보를 닦으려는 현 회장의 잰걸음에 재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