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나가라” 시대 앞선 교육 펼쳐
▲ 백낙준 박사 부부와 필자. |
백낙준 총장은 한국전쟁 발발 2개월 전 문교부(현 교과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김윤경 문학원장이 총장서리를 맡았다. 김 총장서리는 6월 27일 인민군이 서울 근교까지 와서 서울진입을 준비할 때, 즉 연희대 교정까지 포격소리가 들릴 때 휴교선언을 내렸다. 전쟁으로 인한 휴교. 정말이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1967년 뉴욕 유엔대표부에 근무할 때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을 봤는데 오스트리아가 침공당하는 긴박한 상황이 아주 인상 깊었다. 바로 한국전쟁 때 긴박했던 우리의 심정을 떠올랐기 때문이다. 참고로 노천극장에서 휴교선언을 하고 있을 동안에도 인민군의 야크 전투기(소련제 프로펠러 전투기)가 여의도 비행장을 폭격하고 국군을 실은 화물열차가 수색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백낙준 박사가 문교부 장관으로 가기 바로 직전에 흥미로운 일화도 있었다. 1949년 9월에 입학한 우리(49학번)는 학제가 다시 4월로 바뀌게 되어 중간단계의 잠정조치에 의해 6월이 신학기가 되어 2학년으로 올라갔다. 마침 1950년도 신입생 입학시험이 4월로 예정돼 있었는데 문교부는 서울대를 1차로 연희대와 고려대를 2차로 발표하였다. 그런데 백낙준 총장이 연희대는 특차라고 먼저 신입생을 뽑는다고 독단적으로 발표하고 입학시험을 치렀다. 그래서 연희대가 1차, 서울대가 2차, 고려대가 3차가 돼 버렸다. 당연히 문교부와 서울대 등의 심기가 편치 않았다. 이러한 미묘한 냉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백낙준 총장이 문교부 장관으로 가게 된 것이다.
지금의 연세대 재학생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만 한국전쟁 때 연희대학은 격전지이기도 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서울탈환을 위해 진격할 때 연희고지에서 저항하는 인민군과 격전을 벌인 것이다. 폭격과 포격으로 본관이 전소되고 원두우 박사(원한경 총장의 부친)의 동상도 파괴되었다. 이 와중에 6·25 이전 학생들의 성적표가 전소되기도 했다. 1950년 5월 노천극장에서 열린 연희대학교의 역사적인 제1회 졸업식에는 문교부 장관이면서 총장인 백낙준 박사가 직접 참석하여 졸업장을 수여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데 참 따뜻하고 맑은 날이었다. 이때의 연희대는 건물이 언더우드 홀 등 5개밖에 없었는데 이미 지금의 사회과학대학 건축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신촌에만 건물이 100개도 넘는다.
한국전쟁 발발 얼마 전에는 무엇인가 이상한 기류가 돌았다. 김구 선생이 암살되었고 학도호국단이 창설돼 서울운동장에서 각 대학의 행진이 있었다. 또 1930년생에 대한 징병검사도 있었다. 당시 연희대 학도호국단은 단장이 장순덕, 감찰대장 박갑득(박갑철 아이스하키회장의 계씨(남의 동생을 높여부르는 말)), 부대장이 홍영철이었다. 홍영철은 4·19 때의 소공동파 두목으로 재판받은 유명한 인물이다.
필자는 1950년 6월 20일 행정3부 고등고시(현 외무고시에 해당)에 응시, 종로세무서에서 2000원 인지를 사서 붙여 학부 1학년 수료증과 함께 지금의 정부청사 모퉁이에 있는 고시위원회에 원서를 냈다. 8월 3일에 집결하여 8월 4일부터 12일까지 시험을 치게 돼 있어 한창 준비를 하는데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 바로 서울이 함락되고 나라가 흥망의 기로에 서게 됐고, 이 전쟁은 3년이나 지속됐으니 외교관의 꿈을 위해 계속 공부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필자는 육군 장교로 전쟁의 최전방으로 나가게 됐다.
▲ 필자가 1954년 연희대 언더우드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훗날 연세대 중앙도서관 앞에 백낙준 초대 총장의 동상이 세워졌다. |
다시 한국전쟁 때의 연희대로 돌아가 보자. 6월 27일 휴교령이 떨어지고 학생들은 제 살 길을 찾아 흩어졌다. 그리고 결사대를 모집했는데 2명이 지원했다. 나중에 그 결사대 지원자 중 한 사람이 인민군 치하의 서울을 걸어다니 길래 “결사대에 간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남산 KBS 방송국에 집결하라 해서 갔더니 다 도망가고 없어 그냥 집으로 갔다”고 했다. 휴교 후 나는 대구 고향친구이자 야구선수인 변응원과 서울역에 갔다. 기차가 하나 서 있는데 지붕 위까지 피난민이 파리떼처럼 올라가 있었다. 열차가 안 간다고 하기에 명륜동3가의 변응원 집으로 갔다. 나중에 들으니 그 후 기차는 출발했다고 한다. 그날 밤 한강철교는 폭파되고 서울시민은 시내에 갇히게 되었다.
그날 밤 포천서 밀려오는 인민군과 국군이 미아리에서 격전을 벌였고 새벽에는 인민군이 서울로 입성했다. 그날 밤 변응원과 나는 밤새도록 이불을 쓰고 혹시 포탄이 집으로 떨어지면 어쩌나 하며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전쟁은 무법천지다.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온 후에는 혜화동 여의대병원에서 인민군 부상병들이 따발총을 마구 쏘아대곤 했다. 며칠 뒤 또 총소리가 나서 2층 창문을 열고 보니 인민군 2개 분대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냥 보던 책을 다시 잡았는데 갑자기 아주머니가 우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인민군이 총검을 들이대고 올라와서 무기를 어디에 숨겼냐며 천장과 다다미를 쑤셔댔다. 인민군 중위는 권총을 빼고 베란다로 나오라했다. 시키는 대로 나가면 바로 총을 쏠 기세였다. 그래서 안 나가고 옥신각신하는데 곧 개를 끌고 외출했던 변응원이 끌려올라와 상황이 좀 나아졌다. 하지만 인민군은 바로 총을 거두지 않았다. 그때 천우신조가 일어났다. 우연히 방문 왔던 서울법대 3학년의 한태원이 이 자리로 끌려온 것이다. 그가 좌익운동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한태원이 인민군에게 ‘법대 조직책’임을 밝힌 덕에 인민군은 총을 거뒀다.
그래도 인민군은 보초를 세워놓고 갔고 밤에 보위부(안호상 장관댁)에서 호출이 왔다. 다시 다 죽나보다 했는데 한태원이 잘 얘기한 덕에 훈시만 실컷 듣고 밤늦은 시간에 온가족이 풀려났다.
백낙준 박사는 해방 후의 격동기에 학교를 지키고 연희전문학교를 연희대학교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연세대학교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육성하는 초석이 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정부의 부산 임시수도 피난시절에는 문교부 장관으로서 어려운 한국의 대학교육의 큰 길잡이 역할도 했다. 전쟁 중 서울수복 후에는 다시 연세대 총장으로 복귀했고 이후 4·19학생혁명 후 새 헌법에 의해 치러진 선거에서 참의원 의원에 당선돼 최초의 양원제에서 참의원 의장을 지냈다. 한때 기독교민주당 창당 이야기도 있었지만 5·16군사혁명으로 국회는 해산되고 정치활동이 제약되면서 정계를 떠났다.
필자가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백 박사의 가르침은 ‘신생독립 대한민국의 젊은 학도들이 앞으로 큰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에게 사명감과 자긍심을 키우고 대학의 낭만을 가르치려 애를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1학년에 들어가니 백낙준 총장은 영어부터 하라고 강조했다. “너희는 앞으로 세계에 나가서 한국을 빛낼 사람들이다. 우선 영어가 제일 필요하다. 영어가 안 되면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이었다.
▲ 백낙준 박사 생일 때 모인 가족과 지인들. |
다음으로 백 박사가 강조한 것은 인간관계였다. 인생에 있어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이다. 이때 젊은 대학생들은 생각 없이 학교에만 나가고, 명동에 가서 놀고, 이유 없이 몰려다니며 싸움질을 하곤 했다. 광복 후 심각한 좌우격돌에 학생들이 많이 개입한 결과였다.
백 박사는 1학년 때 4학년까지 사귀고 4학년 때 1학년까지 사귀면 대학시절에 거의 위아래 10년 또래 사람들을 사귀어 평생 벗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이지 훌륭한 교훈이다. 참고로 연세대의 자매학교인 일본의 게이오 대학은 일관교육이라 그런지 일본사회에서 가장 단결력이 강하다고 한다. 일관교육이란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까지 동계진학제도(내부진학제도)를 말한다. 물론 전교생이 그런 것은 아니다.
연희대에는 노천극장이 있었고 여기에서 일주일에 3시간 노천예배가 있었다. 전교생이 1000명밖에 안되니 전교생이 일주일에 세 번씩 모였다. 백 총장은 자주 세계의 유명 인사를 초청했다. 기억나는 것은 덜레스(John Foster Dulles) 미국 국무장관, 세계적인 신학자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박사 등이다. 그동안 일본문화 속에 살던 우리에게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한 것이다. 백 총장은 직접 통역을 했다. 좋은 통역을 하려면 영어실력만으로는 부족하고 신학, 철학, 사학, 문학, 역사 등 넓게(깊지 않더라도) 지식이 있어야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백 총장을 통해 배웠다. 영어보다 한국말 통역이 더 멋진 데가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백 박사가 참의원 의장직에서 물러나고 조용히 쉬고 있을 때 나는 청와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2~3년 동안 백 박사 생신 때 백 총장과 최의순 여사를 초청해 후배들과 함께 축하연을 열어드렸다. 평생의 은사 백낙준 박사는 이때 야당으로 몰려 행동이 부자유스러울 때였다.
백낙준 은사를 만나면 “그때(대학시절) 가르침을 받은 인간관계와 영어의 중요성, 세계관에 대한 가르침은 늘 기억하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덕에 오늘날이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이에 당신은 무척 보람을 느끼고 흐뭇해하는 것 같았다. 연세대학교 중앙에는 팔을 펼치고 학생들을 오라하는 듯한 언더우드의 동상이 있다. 그리고 백양로 중간에 있는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 백낙준 박사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연세의 역사와 전통과 함께.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