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
▲ 백선엽 대장(왼쪽)과 필자. |
지난 정권 시절 국회에서 L 아무개 장관에게 북한이 남침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는데 그 L 장관은 끝까지 모르겠다고 한 바 있다. 한국전쟁 발발 후에 출생을 해서 몰랐다고 그러는지 정말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국군장병 5만 명 중에 절반이 외출 나가 있을 때 인민군 20만 명이 탱크 200대, 전폭기 200대를 앞세워 전 전선에서 일제히 한국을 침공했다.
전쟁 때 영웅이 나온다고 했다. 이때 ‘살아 있는 전쟁영웅’ 백선엽 대령은 서부전선을 지키는 1사단장으로서 잠시 시흥에 있는 육군보병학교에서 오리엔테이션을 실시하고 있었다. 인민군의 남침과 개성 함락 보고를 받고 즉시 보병 1사단으로 복귀, 서울이 함락됐는데도 6일간이나 임진강 및 문산 일대를 지키고 명령에 의해서 한강이남으로 철수했다. 이후 3년 1개월 2일 17시간의 기나긴 한국전쟁 기간 내내 대한민국을 지키는 데 헌신했다.
한국전쟁 내내 정일권, 이형근, 유재흥, 장도영, 김백일, 송요찬, 채병덕, 김종오, 이한림, 최영희, 이성가, 강문봉, 임부택 등 많은 장성이 용맹을 떨치고, 많은 장병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다. 또 35만 명의 유엔군 장병이 한국전에 참가했고,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 전사자 3만 7000여 명, 한국군 전사자가 15만 명이었다.
6월 27일 후퇴를 할 때 백 사단장은 뗏목으로 한강을 건넜다. 한강다리는 28일 새벽에 폭파되고 100만 서울시민은 갇히게 되어 인민군 치하에서 공포의 100일을 보내게 됐다. 백선엽의 1사단은 지연작전을 하는 한 달 동안, 아니 6·25전쟁 기간 내내 건제(建制)가 무너진 적이 없었다. 어쨌든 1사단은 연합군이 도착하고 국군의 지연작전에 따라 수원, 안성, 청주, 음성, 함창, 상주를 거쳐 대구와 왜관 옆의 다부동으로 가서 미1기갑사단과 함께 낙동강 전선을 사수했다.
김일성이 8·15 전에 남침통일을 완수하고자 했던 까닭에 인민군은 오산, 평택, 천안, 대전, 황간 등지에서 미군의 스미스대대를 비롯한 미24사단의 방어를 뚫고 파죽지세로 밀어붙였다. 즉 인민군 3, 13, 15 3개 사단이 당장 대구를 삼킬 듯했다. 대구가 떨어지면 부산까지 밀릴 판이었다.
이때 백선엽은 미군의 융단폭격 속에 마이켈리스 대령(후에 8군사령관)이 이끄는 27연대의 후퇴를 막았다. 사단장이 후퇴하는 병사들 앞에 나가 “내가 앞장설 테니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고 한 말은 유명한 이야기다. 당시 1사단 병사들은 후퇴하지 않고 방어선을 사수했다. 이 방어전투에서 1사단은 장교 56명을 포함 2300명이 전사했다. 물론 적군은 5690명이 전사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를 발판으로 전세는 역전됐다. 6·25 전쟁 때 한국군 전력은 미 1개 사단에 한국군 3개 사단 정도였다. 백 장군은 한미합동작전 즉, 미 공군과 포병 및 전차부대의 지원을 얻어내 전투를 유지하는 데 귀재였다. 심지어 미군부대를 배속받아 지휘하기도 했다. 백선엽의 다부동 방어는 한국전쟁에서 한국군이 자랑할 만한 대표적인 전투였다.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 수복 후 백선엽의 1사단은 후퇴했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서울에 입성하고 계속 북진을 거듭, 평양에 제일 먼저 들어갔다.
원래 한국군은 너무 기동력과 화력이 열세라 미군의 진격을 못 따라갈 것이라는 이유로 평양 공략에는 빠져있었다. 하지만 백선엽은 밀번 미1군단장에게 간청해 어려운 작전명령을 변경시켜 이승만 대통령의 희망대로 1사단이 10월 19일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했다. 이는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백선엽 참모총장(오른쪽)과 필자가 야전연습장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 |
백선엽 장군은 여주에서 미8군 지휘관회의 후 귀환 도중 대관령에서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김백일 1군단장의 뒤를 이어 강릉의 한국군 1군단장이 됐다. 1군단은 유일한 한국군 군단으로 동해안에서 고성 밑까지 진격, 351고지를 탈환했다. 이때 백 장군은 1군단 사령부를 강릉에서 주문진으로 옮겼다.
1951년에서 52년 초까지는 전·후방이 따로 없어 패잔병 등에 의한 게릴라전이 심해 어디도 안전하지 못했다. 국회의원들의 결의와 그리스에서 게릴라소탕 경험이 많은 밴 플리트 8군사령관의 요청으로 백선엽 1군단장은 다시 수도사단(송요찬)과 8사단(최영희)을 이끌고 지리산에서 ‘쥐잡기 작전’을 실시, 빨치산을 완전 소탕했다. 이 시절은 필자가 보병학교(부산, 광주)에서 야전훈련할 때였는데 교도대가 완전무장하고 우리를 지켜주곤 했다.
한국동란 내내 중공군은 꼭 약한 한국사단을 공격했는데 3군단도 붕괴되고, 8사단, 6사단 등 여러 사단이 무너졌다. 그래서 속초남방에서 한국군을 사단별로 전원훈련을 시키고 2군단을 창설, 백 1군단장이 전보되었다. 그전에 백선엽 장군은 한국휴전회담에 한국대표로 이승만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조이(Joy) 제독, 버크(Burke) 제독과 함께 북의 남일 대장과 대면하기도 했다.
1952년 7월 부산 정치파동 직후 백선엽 중장은 이종찬 총장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장관을 하라는 말에는 “군인으로 남겠습니다”라고 사양했고, 이 대통령은 싫은 얼굴을 하면서도 이를 받아줬다. 그리고 1953년 1월 최초의 육군 대장이 되었다. 필자는 미국보병학교에 가기 위해 대구에서 1개월간 양식 먹는 것, 넥타이 매는 것부터 미국문화에 대한 교육을 받을 때 4성장군 백선엽 대장을 육군본부에서 만났다.
그후 3월 15일 150명의 보병장교들이 부산에서 미 해군 수송선에 타기 위해 대구역을 출발할 때 백선엽 참모총장이 직접 작업복 차림으로 전송을 나와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일일이 악수를 했다. 전시 중 일선에 근무하던 위관급 장교들이 미국 군사학교에 유학가는 일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참모총장이 직접 전송을 나온 것도 이례적이었다. 그만큼 부하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상관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휴전 후 9월에 귀국했는데 그 전인 5월 31일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이 미국보병학교에서 훈련 중인 우리 한국장교들을 방문했다.
얼마 전 백 장군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때 한 달에 150달러씩 받았다고 했더니 그 당시 상황에서 많이 준 것이라 했다. 필자는 귀국 후 27사단 79연대 정보주임장교로 양양에 부임했다가 화천의 2군단으로 전임되었는데 이때 백 대장은 최초의 야전군인 1군을 창설하고 1군사령관으로서 한국군 전력증강에 힘을 쏟았다.
▲ 미국보병학교에 유학을 간 장교들이 단체사진을 찍었다. |
이때 한국군 현대화의 일환으로 모든 보급이 이루어지도록 병참, 병기, 탄약창 등이 정비됐다. 또 군관구가 병사업무도 관장하게 되고 기획예산제도도 확립되고 육해공군사관학교에 이어 각 병과학교도 설립, 한국군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이 모든 것이 미국군부의 절대 협력과 지원에 힘입은 것이었다. 물질적으로 풍부해지고, 체계가 잡힌 것도 중요했지만 한국전쟁 초기 패퇴하며 사단, 군단까지 와해됐던 국군의 자신감을 키우는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1군에서 전 지휘관 및 미군지휘관을 앞에 두고 기동연습이 있을 때는 백 참모총장이 와서 국군현대화를 주도한 연설을 한다. 그때 내가 통역을 하던 사진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
백선엽 대장은 한국전쟁 내내 종횡무진하며 다부동 전투에서 풍전등화의 대구 이남을 방어하고, 평양에 미군보다 먼저 입성하고, 야전사령관으로 공비를 소탕하고,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정전회담대표로 활약했다. 어떤 때는 방어선 제일 앞에서, 어떤 때는 미군의 절대적 화력지원, 그리고 군사원조를 때내서 승전에 기여하고 최초의 4성장군이 됐다.
한국군의 살아있는 전설인 백선엽 대장은 4·19 후에 예편, 대사직 10년을 마치고 교통부 장관으로 복귀했다. 이때 필자는 청와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당연히 자주 만나곤 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1963년 현역 중령으로 내각수반실에 근무할 때였다. 독일을 시찰하고 프랑스에 김봉기 <코리아헤럴드> 부사장과 들렀다. 대사관에 백 대사를 예방하고 호텔에 오는데 대사차로 호텔까지 데려다주고 차를 쓰라고 말한 뒤 걸어가 버렸다. 부하를 그만큼 아끼고,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정신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전부터 전쟁기념관 건립에도 힘을 쏟아 이제는 훌륭한 전사를 수록한 멋진 전쟁기념관이 구 육군본부자리에 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예산을 그래도 많이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 백선엽 대장의 말이다.
얼마 전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댁에서 고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 생신 90주년 모임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백 대장은 “1945년 평양에 김일성이 군중 앞에 소련훈장을 달고 나타났는데 70세 정도의 나이라고 생각하던 김일성이 정작 38세의 젊은 청년이라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부터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강력한 안보태세의 중요성까지 거침없이 역설했다.
가까운 일본도 그렇지 않은데 유독 우리나라는 원로가 없고, 영웅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영웅은 죽이기에 바쁘다. 즉,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역적이 된 일이 많다. 정치는 포퓰리즘이 판치고 있다.
한국전쟁 때 백선엽 대장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끝으로 나라를 지킨 살아있는 영웅 백선엽 대장에게 한국전쟁이 환갑을 맞은 이 해에 국민의 손으로 ‘명예원수’라는 감사의 보답이 주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