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될 방문길에 ‘후계구도’ 큰 그림
▲ 지난 3일 중국 랴오닝성 다롄에 위치한 한 호텔을 떠나기 위해 선글라스를 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이날 김 위원장은 17량의 특별열차를 타고 중국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뉴시스 |
정보당국 관계자들은 북한이 천안함 사건 배후로 지목받고 있는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전격 방중한 배경에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전문가들이 예상하고 있는 방중 목적 외에 또 다른 노림수가 투영돼 있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과연 김 위원장이 구상하고 있는 방중 노림수는 무엇일까. 6자회담과 천안함 사건 등 남북은 물론 한반도 주변 정세를 달구는 또다른 핵뇌관으로 부상한 김 위원장의 방중 이면에 숨겨진 노림수를 들여다 봤다.
천안함 사태 이후 남북 경색이 심화되고 있는 민감한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방중 카드를 꺼내든 것은 경제적 고립 등으로 인한 북한의 정세가 그만큼 급박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실제로 북한은 극심한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측의 대북지원은 대부분 단절되고 있고, 금강산관광사업도 사실상 폐업 위기에 처해 있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도 북한의 핵 실험을 강력히 제재하고 있어 무기수출 마저 차단된 상황이다. 여기에 지난해 말 시행했던 화폐개혁이 실패하면서 북한 경제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갈수록 동요되고 있는 민심을 다잡고 군과 당을 추스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게 김 위원장의 당면 과제다. 김 위원장은 방중 첫날인 5월 3일 새벽 북한 접경지역인 단둥에 도착한 뒤 다롄 동북지역 개발구를 둘러본 데 이어 4일에도 숙소인 푸리화호텔을 나서 30㎞ 떨어진 다롄 경제기술 개발구를 방문해 건설 중인 3부두를 1시간여 시찰했다. 북한이 처한 어려운 경제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이번 방중 목적을 대변하는 행보로 풀이된다. 북한이 최근 나진항 개발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 미뤄 김 위원장이 다롄 일대 항만시설을 벤치마킹해 나진항을 개발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행보로 분석되고 있다.
중국은 북한의 어려운 상황과 한반도 정세를 적절히 활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국 정부가 김 위원장의 방문을 허용한 중국 측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곱지않은 시선을 의식한 듯 6일 외교부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어떤 국가 지도자의 방문을 받아들이는 것은 중국의 내부 문제며 주권의 범위에 있는 것”이라며 분명한 선을 그은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 지난 5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후진타오 중국 주석을 만나 악수하는 모습. |
결론적으로 김 위원장과 후 주석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각각 ‘6자회담 복귀’와 ‘경제협력’ 카드로 ‘빅딜’에 합의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두 사람이 천안함 사태에 대해서 의견을 조율했는지 여부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대북 전문가들은 천안함 사고 원인에 대한 조사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두 사람이 이 문제를 논의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배후자로 지목받고 있는 김 위원장 입장에서 이 문제를 먼저 언급할 이유가 없고, 후 주석 또한 6자회담 재개를 위해 김 위원장을 달래야 하는 상황에서 민감한 사안을 의제로 다루지 않았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정부당국은 김 위원장과 후 주석이 ‘빅딜’에 합의하고 양국 간 우호를 재확인한 만큼 천안함 사건이 6자회담에 묻힐 수 있다는 우려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또한 천안함 사건 배후에 북한이 개입한 정황이나 증거가 드러나더라도 중국이 북한 측의 입장을 옹호하는 등 태도변화를 경계하고 있다.
정보당국 관계자들은 김 위원장의 이번 방중 이면에는 ‘빅딜’ 외에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노림수가 투영돼 있을 것이란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무엇보다 김 위원장은 짧지 않은 방중 일정을 통해 자신의 건재함과 함께 권력자로서의 통큰 행보를 보여줬다. 실제로 김 위원장은 그동안 건강이상설 등 자신의 건강을 둘러싼 구설수가 끊이질 않았다. 김 위원장은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고, 2009년 5월부터는 만성신부전증으로 인공투석을 받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 김정일 위원장이 첫 방문지인 다롄에서 묵은 것으로 알려진 다롄 푸리화 호텔의 홈페이지에 공개된 750㎡ 규모의 총통방 내부 모습. |
이처럼 김 위원장은 일부 불편한 모습이 공개되기는 했지만 몇 차례 파격적인 노출 행보로 자신의 건재함을 대외에 과시하는 한편 베이징 중심도로를 승용차를 이용해 공개적으로 통과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자신을 둘러싼 건강이상설을 일축하고 동선 공개에 따른 신변 위협을 감수하는 파격적인 방중 행보로 절대 권력자로서의 위상과 건재함을 과시하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의 세습승계 문제도 김 위원장의 방중 노림수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김 위원장은 3남인 김정은을 사실상 후계자로 내정한 뒤 당과 군부를 서서히 장악시키는 후계수업 작업을 치밀하게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일부 대북 소식통들에 따르면 김 씨 일가의 3대 세습 승계 문제를 놓고 북한 내부에서 동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방중을 통해 후 주석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로부터 김정은 후계 승계를 지지받을 경우 내부 잡음은 물론 공개적으로 승계 작업을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김 위원장이 이번 방중에 김정은을 동행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김 위원장은 김정은 동행 여부를 떠나 방중 기간에 만난 중국 지도부에게 후계 문제와 관련한 자신의 뜻을 피력하고 지지를 요청했을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다.
과연 김 위원장은 이번 방중을 통해 중국에 무엇을 약속하고 그 대가로 어떤 선물을 받았을까. ‘천안함 정국’으로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남북 경색 국면의 또다른 뇌관으로 부상한 김 위원장의 방중 노림수에 국민적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