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세광 저격’ 전 대북 중대제안하려 했다
▲ 박정희 전 대통령, 육영수 여사 생전 모습. |
이번 ‘대통령 박정희’는 좀 더 어렵다. 그리고 아직도 자세한 속사정을 밝히기가 쉽지 않은 일화가 많다. 그 당시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또 이후 태권도와 한국스포츠를 세계화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중심으로 회고를 시작하겠다.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무엇보다 조국 근대화가 최우선이었다. 보릿고개를 없애고, 식량 자급자족을 이룩하고, 전국도 1일 생활권으로 만들려고 했다. 얼마나 열의가 강했으면 새마을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했겠는가. 예컨대 고속도로 건설도 장관의 반대를 무릅쓰고 완공시켰다. 그리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 자본축적을 통해 중공업을 육성, 수출대국으로 달려갔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생활은 지극히 검소했다. 대통령의 생일날이나 송년회 때도 육 여사와 함께 수석비서관, 경호실장, 차장, 기자단을 초청해 떡과 국수, 식혜로 식단을 짰다. 이런 자리의 최대 화제 또한 수출이 1억 달러를 돌파했다는 등 대체로 경제발전에 관한 것들이었다. 주말에 골프를 친 후에는 그 유명한 ‘막사(막걸리와 사이다를 섞은 것)’를 즐겼다. 그때는 독극물 검사장비가 없을 때였기에 매번 경호실이 고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이었던 1963년 11월,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 대사관저에 머물렀는데 그때 대사관 담당은 나였다. 워싱턴 비행장에 서 있는데 도착한 후 지나가면서 “애들 잘 크냐”고 물어보더니 내 손을 잡고 같이 걸어 나갔다.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은 채 걸어가는데 누가 뒤에서 ‘툭’ 쳤다. 돌아보니 박종규 경호실장이 쓴 미소를 지으면서 입모양으로 “떨어져!”라고 했다. 경호에 방해된다는 것이다. 박종규는 전에 박 대통령이 케네디 대통령과의 면담을 위해 워싱턴으로 가던 도중 하와이에 기착했을 때 관중 속에 이상한 것을 든 사람을 보고 총인 줄 알고 박 대통령을 밀어서 넘어질 뻔하게 한 일도 있다. 유명한 일화다.
1964년 한일협정은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타결되어 이동원 외무장관이 서명을 했다. 하지만 대대적인 학생소요가 일어났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김종필 당의장에게 2차 외유를 떠나게 했다. 야사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때 김종필 의장이 사임을 안 한다고 박종규 경호실장이 쌍권총을 차고 서울시내를 찾아다닌 일도 있다.
한일협정에서 들어오는 ‘무상 3억 달러, 유상 3억 달러’는 그 당시 일본의 외환고가 11억 달러밖에 안 될 때인 것을 감안하면 큰돈이었다. 그 돈으로 경제개발, 특히 포항제철 같은 기간산업 확충에 힘썼다. 한국은 이때 경제개발에 투자할 자본이 없을 때였다. 재벌을 키워야 했다. 신용장만 열어오면 보상금이 나가고, 보호해주고, 세금면제와 융자의 혜택을 주었다.
그 결과 관치와 재벌육성으로 특권과 독점을 양산했고, 불평등한 소득분배, 경제위기, 노사갈등, 환경오염 등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재벌의 불투명 경영, 변칙 상속은 어김없이 개혁의 대상이지만 재벌이 개도국 기업으로서는 유일하게 성공한 글로벌 기업이라는 긍정적 유산도 됐다.
박 대통령 때는 사건이 많았다.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을 놓고 김성건 등의 항명사건이 있어 체포되었고, 김대중 사건도 있었다. 또 동백림 사건도 있었다. 68년에는 민방위제도가 확립되었다. 또 KIST를 창설, 해외에서 많은 과학자들을 데려와서 핵연구도 했지만 미국의 압력으로 핵개발은 거의 다 된 상태에서 취소했다. 1978년에는 고리원자력발전소가 가동, 원자력국가를 향한 길을 내디뎠다. 지금은 7000만 ㎾의 발전량을 우리나라가 자랑한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무장공비 21명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침투해 세검정까지 진입, 김신조만 포로로 잡히고 나머지는 모두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신조의 청와대 습격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실미도에서 북파특수요원을 훈련시키다가 계획을 중단했는데 나중에 이것이 문제가 됐다. 그 유명한 실미도 사건이다. 하루(1971년)는 실미도에서 대원들이 항의하기 위해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군 당국에서는 시시각각 공비가 상륙한 것처럼 보도했다. 그러나 노량진까지 오다가 자폭해버렸다는 보고로 상황이 끝나버렸다.
1969년 닉슨 대통령 취임 후 미군 2개 사단 철수 발표가 나오자 박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 샌프란시스코의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에서 3일간 닉슨과 회담, 미군철수영향을 최소한으로 축소했다. 그후 카터 대통령이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미군철수를 발표했지만 미 국방부의 반대로 중지된 바 있다. 늘 노스웨스트(Northwest) 항공을 이용하다가 이때 처음으로 팬암(PANAM) 항공기를 10만 달러에 전세 내 썼다. 박 대통령이 탄 전세기가 한국 영공에 들어오자 양쪽에 태극기를 표시한 우리공군 전투기가 엄호를 해주던 것도 아주 감격적이었다.
▲ 5·16 뒤 미국합참의장 콜린스 대장과 박정희 내각수반 겸 최고회의의장 회동. 당시 필자(가운데)는 의전비서관이었다.(위) 5·16 직후 미국 밴 플리트 대장과의 만찬(맨 오른쪽이 박정희 의장). |
박 대통령은 내 말을 듣고나서 “네 말은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통과된 거냐?”고 물었다. 그래서 “통과는 되었습니다”라고 답하고 워싱턴에서 사온 가디건과 셔츠, 타이 등을 드렸다. 박 대통령은 일일이 펴보고는 여비도 없을 텐데 이런 것 왜 사왔냐고 나무랐다. 닉슨 대통령 때 군사원조, 미국주둔, 의회외교 등이 이슈화돼 상하원의원 한 사람 한 사람 분류해서 대미 로비를 통해 우리 입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필자가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지시받았는데 질투심 많은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밉보여 사표를 내는 등 한 달간 충돌이 있었고 결국 일을 진행하지 못했다.
박 대통령에 대한 보고가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근대화 과업을 꼭 완성한다’는 의지로 3선 개헌(1969년)을 추진할 때 박 대통령은 심리적으로 큰 부담을 느꼈다. 김종필 계열도 많이 당했다.
마침 이때 장경순 국회부의장 일행이 미 의회의 초청을 받았는데 알버트 하원의장 등과 친분이 있는 필자가 필요하다고 요청해서 동행했다. 하루 먼저 돌아온 필자가 불려 올라가 ‘(삼선개헌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어떠냐’는 질문을 두 번이나 받았다. 사실 미국은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장 부의장을 도와주러 간 것이기에 답변하기가 곤란했다.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라 “장 부의장이 내일 오면 들으십시오”라고 두 번 모두 그렇게 대답했다. 이때 필자는 점수를 많이 잃었다. 장 부의장은 그 다음날 “(알버트 의장의 말이) 지지는 안 해도, 반대는 안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1971년 대선에서 삼선에 성공한 후 박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어 유신헌법이 통과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비상계엄 때 탱크가 청와대 앞에 배치됐는데 미 대사관은 농담으로 ‘탱크 총부리가 거꾸로 돌려지면 어떻게 하냐’고 묻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이후락 주도로 이루어졌다. 유신헌법이 제정되고 비상조치법으로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제3공화국 헌법은 미국도 나쁘지 않게 보고 있었다. 이때 박종규 경호실장은 박 대통령의 일본방문 준비차 나가 있다가 급거 불려왔고 일본방문은 취소되었다. 박 대통령이 장충체육관에서의 취임식을 마친 후 떠나자마자 대형 사진액자가 떨어졌다. 아주 불길한 감이 들었지만 대통령이 나간 후라 잊어버렸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7·4공동성명, 즉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북한비밀방문과 김일성 주석 면담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북한에서도 박성철 부수상이 내려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지만 사실 박 대통령은 1974년 8·15날, 즉 문세광 저격사건 발생 당시 경축사에서 획기적인 제안을 하려했는데 사건발생으로 묻혀버렸다.
참고로 1973년 윤필용 사건(수방사령관이던 윤필용소장이 이후락에게 “각하의 후계자는 형님이십니다”라고 해 불거진 사건)으로 11기생 핵심인 손영길, 권익현 등이 제거됐다. 하지만 전두환, 노태우는 박종규 실장이 박 대통령에게 건의해 구제되었다. 그 덕에 박종규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사망한 김택수 IOC위원의 후임으로 추천되었다.
1974년 8·15경축식전에서 문세광의 총탄에 육영수 영부인이 피격,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경호실에 있던 안재송이라는 사격선수 출신 경호관도 생각이 난다. 육영수 여사 저격 후 내게 와서 눈물까지 흘리며 자기가 평생 권총사격을 익혀왔는데 한번 써보지도 못하게 됐다고 하소연했다. 8·15날 안재송도 대통령을 수행했는데 문세광의 저격 때는 모두 무대 뒤에 있었다. 그 안재송도 나중에 궁정동(10·26)에서 총을 뽑다가 상대가 먼저 쏜 총에 살해되었다.
참고로 1973년 유정회가 생길 때 유정회 국회의원이 되라고 박종규 경호실장을 통해 의견타진이 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4·19를 직접 치르고 정치의 무상함을 본 필자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던 차라 정중히 사양했다. 그랬더니 박 실장이 “이상한 사람이 다 있다” “국회의원 하라고 해도 안 하는 사람이 다 있다”고 주위에 말하고 다녔다.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으로 경호실장에서 물러난 박종규 실장은 오정근 전 국세청장을 후임으로 추천했는데 차지철이 경호실장으로 발탁됐다. 빈 자리는 이재전 전두환 노태우 김상수 등 현역장군들로 채워졌다. 근위사단처럼 재편된 것이다. 그후 무슨 일로 차지철 실장을 만났더니 그는 “1개 사단이 (청와대를) 공격해도 막을 수 있다”고 하기에 내가 놀란 적이 있다. 청와대 경호실은 대통령을 경호하는 곳이지 전투하는 곳이 아닌데 오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 인사문제에 타 기관장이 관여하면 용서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박희도 3군사령관을 참모총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노재현 국방장관이 그 뜻을 받들어 결재를 얻기 위해 올라갔는데 그전에 김재규 부장이 먼저 정보보고를 했다. “2기생(이세호 등), 3기생 노재현, 박희도가 다 해먹는다고 젊은 장군이 말이 많습니다.” 이에 김재규 복안대로 5기생인 정승화(김재규 측근)가 지명되었다.
정승화와 차지철은 무슨 이유인지 잘못 갖다 놓은 꼴이 되었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란 말은 없다. 차지철은 30대대 연병장에서 매주 토요일 열병식도 열었고, 심지어 김재규 그리고 자기가 소령 때 육군참모총장이던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다른 것 타라고 할 정도로 횡포를 부렸다. YH사건 때도 김영삼의 국회 제명에 깊숙이 관여했다. 경호실장이 정치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