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회사에 대출도 보증도 ‘척척’
▲ 구멍 뻥뻥 수탁보증제의 허점으로 인해 은행 측에서 현장방문 같은 실질 심사없이 대출을 해주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
경찰은 법인 간 허위 거래실적을 만들어 대출을 받은 A 씨 등 일당 8명과 이들에게 법인명의 등을 빌려준 법인 대표 B 씨를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또 유령회사 바지사장 역할을 한 노숙자 C 씨 등 26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수출보험공사가 수탁보증제도의 허점을 노린 사기꾼들에게 어이없이 뒤통수를 맞은 기막힌 사건 속으로 들어가 봤다.
A씨 등은 수출보험회사의 수탁보증제도의 허점을 노리고 대대적인 사기를 계획했다. 수탁보증제도는 중소기업의 수출육성을 위해 수출보험공사와 16개 시중은행 간 업무협약에 따라 공사 측이 대출금의 80%를 보증해주는 제도로 지난 2000년에 도입됐다.
이들 일당은 수출보험공사와 금융기관의 업무협약에 따라 금융기관이 수탁보증서 발급부터 대출까지 직접 처리할 뿐 아니라 공사가 대출금의 80%를 보증하기 때문에 까다로운 심사를 거치지 않고 최대 2억 5000만 원까지 손쉽게 대출받을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범행을 모의했다. 실제로 조작된 수출면장에 허위세금계산서를 첨부해 대출승인서를 내도 은행 측에서는 현장방문 같은 실질 심사없이 대출 승인을 해주고, 수출보험공사도 철저한 검증없이 보증을 서준다는 제도상의 허점을 노린 것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대대적인 사기대출을 받기 위해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에 무역업체 사무실까지 설립하고 대출총책과 법인총책, 자료상 등 철저한 역할분담을 통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우선 법인 작업책은 2006년 6월부터 2009년 10월까지 서울역 등지에서 500만~3000만 원을 주고 명의를 빌려 유령업체를 설립했다. 또 빚이 많거나 부도위기에 몰린 회사 대표에게는 대출금의 20~30%를 주겠다고 꾀어 범행을 공모하거나 가담시켰다.
자료상은 법인 간 허위거래를 통해 금융거래실적을 조작하거나 허위로 세금계산서를 만드는 역할을 담당했다. 대출 요건에 맞아 떨어지도록 허위로 그럴싸한 실적을 조작하는 일이었다. 또 은행작업책은 바지사장들을 모아놓고 대출신청 방법 및 은행에서의 행동요령 등에 대해 알려주거나 은행에 동행해 대출을 신청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들 일당은 건당 1억 5000만~2억 5000만 원을 빌리고 이자를 갚지 않고 폐업하는 수법으로 막대한 돈을 챙겨왔다. 이들이 이런 수법으로 편취한 무역금융대출금은 시중 8개 은행을 상대로 46회에 걸쳐 무려 100억 원이 넘었다.
그렇다면 일당의 범행이 너무도 쉽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경찰은 이번 사건의 일차적인 원인에 대해 대출사고나 해당기업이 부도가 났을 경우 직접적인 손해를 피할 수 있는 조치를 마련해 놓은 은행이 애초부터 허술한 서류심사를 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은행 측은 자신들의 손실을 막기 위해 대출금의 20% 이상을 강제로 예치(일명 ‘꺾기’)하도록 하고 있는데, 특히 이 과정에서 업체들에게 대출금의 20%를 가족 등 3자 명의로 예금하게끔 하는 예방책을 써오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즉,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금전적인 책임을 지거나 손해볼 염려가 없는 은행으로서는 깐깐한 대출심사 대신 형식적인 서류심사만 했고, 이것이 국고손실을 야기하는 대형사고를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에 검거된 공범 중 한 명은 경찰에서 “은행에서는 서류가 완벽하다고 판단했는지 별다른 문제를 삼지 않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대대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시중은행들의 ‘꺾기’ 관행이 사라질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대형사고시 은행의 손실 0%를 보장하는 ‘꺾기’ 관행은 금융감독원의 징계대상일 뿐 현행법상으로 처벌할 수 있는 근거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로 만기가 지나도록 대출금과 이자를 갚지 않은 이들 일당으로 인한 모든 부담은 공사 측에서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수탁보증제도에 책정된 예산은 연간 3000억 원에 달한다. 하지만 한국수출보험공사는 2000년부터 최근까지 수탁보증제도로 인해 비롯된 손실이 1471억 원에 달하고, 이중 부정대출로 인한 손실은 2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공사 측은 “2008년 하반기 금융위기 극복 및 수출진흥을 위해 영세 수출업체에 보증제도를 완화하는 과정에서 일부 업체가 브로커와 결탁해 사기대출을 받은 사례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방청 광역수사대 김맹호 경위는 “기업이 한국수출보험공사의 보증신청서류 요건만 갖추면 은행에서 형식적인 심사를 거쳐 무역금융대출금을 받을 수 있다는 제도적 허점을 이용했다”며 “한국수출보험공사의 수탁보증제도의 허점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