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수뇌부 ‘정치 싸움’ 탓 힘든 시기 보내…주축 선수 대거 이탈 속 ‘주전’ 활약 기대
U-20 월드컵 성과에 이어 선발 데뷔전에서 데뷔골까지, 2019-2020시즌 초반 이강인은 승승장구했다.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1년여 시간이 흐른 현재, 발렌시아와 이강인은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직전 시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4위, 코파 델 레이 우승으로 최고의 성과를 냈던 발렌시아는 2019-2020시즌 9위로 곤두박질쳤다. 3강(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존재로 스페인 내 4위는 중상위권 클럽들에 최선의 결과로 평가받는다. 그 4위를 2시즌 연속 차지했던 발렌시아는 거짓말처럼 무력하게 9위로 추락했다. 발렌시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2019-2020시즌이 개막한 직후 마르셀리노 가르시아 토랄 감독이 갑작스레 팀을 떠났다. 좋은 호흡을 보여 온 마테우 알레마니 단장과 함께였다. 이들은 이전 2시즌간 발렌시아의 성공을 이끌어왔다. 리그 개막 이후 단 3라운드만 치른 이례적인 시점이었다.
‘태평성대’를 깬 인물은 피터 림 구단주다. 구단주와 감독·단장은 팀 운영 방식을 놓고 갈등을 벌였다. 구단주는 팀의 가치를 높이고 이윤을 창출하는 금전적 부분에 치중했다. 반면 감독과 단장은 경기력을 높이고 성적을 내는 데 집중하려 해 양측이 부딪혔다.
갈등의 원인으로 이강인이 지목되기도 했다. 구단주는 이강인을 비롯한 구단 유스팀 출신 어린 선수들이 더 많이 기용되기를 바랐다. 마르셀리노 감독이 이강인 등 어린 선수들을 외면했던 것은 아니다. 천천히 출장 기회를 부여하고 있었지만 피터 림은 조바심을 냈다.
이는 후임 감독 선임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마르셀리노 경질 이후 알베르트 셀라데스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성인팀 감독 경험이 전무한 인물 선임에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셀라데스는 스페인 연령별 대표팀 사령탑을 두루 거친 지도자다. 구단주는 셀라데스가 팀 내 어린 선수들의 성장을 돕길 원한 것이다.
그러나 셀라데스와 발렌시아의 만남도 비극으로 끝났다. 챔피언스리그는 조별리그에서 탈락했고 국왕컵에서도 8강에서 멈췄다. 리그 성적도 신통치 않자 구단은 리그 6경기를 남긴 시점에 감독 경질을 선택했다. 목표로 했던 4위와 이미 멀어진 상태였다.
이강인 역시 만족할 만한 시즌을 보내지 못했다. 셀라데스 감독 부임 초반 출장 기회를 늘려갔고 커리어 최초로 리그 경기에 선발로 나서 데뷔골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내 출장 기회가 줄어들었다. 부상이 겹치며 팀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셀라데스에서 보로 곤살레스로 사령탑이 바뀐 이후 기회를 늘려갔지만 이내 시즌이 마무리됐다.
페란 토레스는 맨시티 이적 직후 구단에 대한 폭로로 팬들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사진=프리미어리그 페이스북
모든 시즌 일정을 마친 이후에도 발렌시아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유스 시절부터 이강인과 절친한 동료였던 페란 토레스가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했다. 더 심각했던 것은 구단의 지난 1년에 대한 토레스의 폭로였다. 충격적이었다. 토레스는 자신과 이강인을 포함한 구단 유스 출신 선수들이 선수단 내에서 이른바 ‘왕따’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구단주의 비호를 받는 어린 선수들 때문에 구단 내 베테랑 선수들은 팀의 성공을 이끌어온 마르셀리노 감독이 경질됐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토레스는 팀의 주장 다니 파레호에 대해 “파레호는 마르셀리노가 떠난 이후 몇 주 동안 나와 이강인과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폭로했다. 토레스는 또 “나는 파레호가 좋은 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이강인은 발렌시아에서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에게 사랑과 자신감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토레스의 발언은 국내 팬들 사이에서 파문을 남긴 것과 달리 스페인 현지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되레 이전부터 구단의 재계약 제의를 거부하고 이적을 추진하며 팀 분위기를 흐렸다는 이유로 토레스가 지탄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팀에 앙심을 품고 떠나는 마당에 비난을 가했다는 것이다.
발렌시아의 혼란은 이뿐만이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대유행)으로 모든 축구단의 수익이 줄어들고 이적 시장이 위축되는 상황에서 발렌시아는 챔피언스리그 진출에도 실패했다. 지난 2년간 밟아온 챔피언스리그 무대에 나서지 못하면서 수익과 흥행을 놓치게 된 것이다. 재정적 어려움을 맞은 이들은 주축 선수들을 연이어 타 구단에 넘기기 시작했다. 맨시티에서 활약하던 스타 다비드 실바가 친정팀 발렌시아로 복귀를 추진했지만 이마저도 발렌시아는 돈이 없어 포기했다.
팀 내에서는 물론 스페인에서도 손꼽히는 유망주 페란 토레스를 맨체스터 시티로 떠내 보낸 데 이어 주장이자 핵심 선수였던 다니 파레호, 또 다른 주전 미드필더 프란시스 코클랭을 동시에 비야레알로 넘겼다. 주축 수비수였던 에제키엘 가라이도 재계약에 실패하며 자유계약으로 풀렸다. 파레호는 팀을 떠나는 순간 “발렌시아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페란 토레스의 폭로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발렌시아의 이적 행렬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로드리고 모레노, 엘리아킴 망갈라, 케빈 가메이로, 무크타르 디아카비 등도 이적 후보로 지목되고 있다.
발렌시아는 다음 시즌 새 유니폼을 발표하면서 이강인을 중심에 내세웠다. 사진=발렌시아 페이스북
발렌시아의 변화가 향후 이강인에게 어떻게 작용될지는 미지수다. 이전부터 더 많은 기회를 위해 임대나 이적을 도모했던 이강인이지만 떠나는 것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 발렌시아로선 이미 많은 선수들을 떠내 보냈기에 이강인마저 이적시키기는 부담스럽다.
이강인은 구단주의 관심과 애정을 받는 선수다. 지난 8월 초 발렌시아의 새 시즌 유니폼을 발표하는 화보에 이강인은 ‘메인 모델’로 나섰다. 신임 하비 그라시아 감독의 다음 시즌 구상에도 포함돼 있다는 보도가 이어지기도 했다.
그라시아 감독의 훈련에서 이강인은 본인이 익숙한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에서 뛴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년간 공격형 미드필더를 기용하지 않는 팀 전술 탓에 이강인은 최적의 기량을 발휘하기 어려운 윙어 위치에서 주로 뛰었다. 다만 이강인의 활약도가 높아지는 것과 별개로 주축 선수가 줄줄이 이탈한 발렌시아의 전력이 약해질 가능성은 있다.
최근 마무리된 2019-2020시즌을 전후로 이강인을 둘러싼 온도는 백팔십도 달라졌다. 현재 만 19세 어린 나이에 그를 놓고 구단 수뇌부가 대립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다. 풍파를 겪은 이강인이 만 20세가 되는 다음 시즌에 어떤 모습을 보일지 팬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