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선발전은 ‘×판’이었다
▲ 4월 13일 이정수가 기자회견을 열고 현재의 진상조사위가 공정성이 결여됐다며 재구성을 요구했다. 왼쪽부터 이준호 코치, 이정수, 부친 이도원 씨. 연합뉴스 |
◦…선발전 당시 양측 합의 있었나
먼저 중요한 것은 선발전 당시 코치들끼리 사전합의가 있었는가 여부다. 대한체육회는 지난해 4월 대표선발전 3000m 슈퍼파이널 경기를 앞두고 일부 코치들과 선수들이 랭킹 5위 안에 함께 들어 국가대표에 선발될 수 있도록 상호 협조하고 시즌 국제대회에서 모두 메달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자신이 지도하는 선수가 5위 안에 들 수 있도록 코치진들끼리 서로 ‘밀어주기’에 합의했다는 것.
곽윤기 역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사전담합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그는 “국가대표선발전을 앞두고 전 코치로부터 ‘이정수가 도와달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며 “대표 선발전 1000m에서 이정수를 도와주면 대신 정수가 올림픽 1000m 개인전은 포기하기로 합의했다고 해 선발전 때 넘어지려는 정수를 잡아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정수가 막상 밴쿠버에선 말을 바꿔 양보하기로 돼 있던 1000m에 출전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선발전에서 같은 팀에 속했던 선수들 역시 ‘실제 곽윤기가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뒤쪽에서 이정수를 커버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밴쿠버에서 이정수는 문제가 된 쇼트트랙 1000m에 출전해 올림픽 신기록을 경신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만약 대한체육회의 발표 내용과 곽윤기의 주장대로 사전에 이런 합의가 있었다면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발이 실력이 아닌 밀어주기와 담합으로 이뤄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실력이 처지는 선수가 사전 합의로 다른 선수의 도움을 받아 국가대표가 됐고, 당시의 합의를 깨고 올림픽 개인전에 출전해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다’는 얘기가 된다. 충격적이면서도 이해가 쉽지 않지만 이 이야기가 현재 쇼트트랙을 둘러싼 진실 공방의 핵심이다.
◦…개인 약속이었나, 팀 전술이었나
이런 주장에 대해 이정수의 지도코치인 이준호 해설위원(KBS)은 사실무근이며 대한체육회가 발표한 ‘국가대표 선발전 당시 합의사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기자회견 당시 이 해설위원은 “코치들 사이에 그런 담합은 없었다”라며 “그동안 있었던 행태는 담합이 아니라 작전”이라고 설명했다. 이 해설위원은 “그동안 올림픽에서 냈던 좋은 결과들 역시 모두 그런 전략적 성공에 있었다”며 “에이스의 금메달 획득을 위해 한 선수를 밀어주는 것은 과거부터 작전상 있었던 일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전 코치가 이정수에게 “선발전 당시 약속했으니 세계팀선수권대회에 출전하지 말라”고 해 이것이 마치 담합을 한 것처럼 보이게 됐다는 것이다.
당사자인 이정수 역시 사적인 약속이나 전략전술상의 밀어주기도 없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선발전 당시에는 잠시 삐끗했을 뿐 넘어질 뻔했던 일도 없다고 일축하고 있다. 곽윤기의 도움을 받은 일도 없는데 전재목 코치가 곽윤기가 도왔다고 말하며 밴쿠버 1000m 개인전을 포기하라고 종용해 오랜 친구와의 우정 때문에 고민하다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전 코치가 급기야 문제가 된 사유서를 작성하게 해 자신의 출전을 강압적으로 막았다는 것이 여태껏 해온 그의 주장이다.
그런데 곽윤기와 이정수의 엇갈린 발언 사이에 전재목 코치가 있다. 둘의 주장대로라면 곽윤기에겐 ‘이정수가 도움을 요청했다’고 말하고, 이정수에게는 ‘윤기가 도와줬으니 개인전을 포기하라, 그게 싫다면 세계선수권대회를 포기하라’고 지시한 사람이 바로 전 코치다. 그러나 전 코치의 말은 다르다. 전 코치는 “외압은 없었고 선발전 밀어주기는 두 선수 간의 합의로 자신은 아는 바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세 사람의 주장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다른 형태의 파벌싸움인가?
결국 이번 논란은 국가대표 선발전 당시에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밝혀야만 풀릴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과연 합의 형식의 담합이냐 아니면 의례적인 에이스 밀어주기였느냐도 물론 밝혀내야 한다.
그런데 그 성격이 어떻든 밑바탕엔 쇼트트랙의 고질병으로 여겨지는 파벌다툼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미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당시 한국 쇼트트랙은 심각한 파벌다툼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화제가 된 바 있다. 다행히 지난 몇 년간 이런 파벌다툼은 더 이상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특히 양대 파벌을 이루던 한체대파의 수장 전명규 부회장과 비한체대파 유태욱 부회장이 지난 2009년 초 박성인 빙상연맹 회장의 주선으로 화해한 이후 파벌다툼은 한때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는 큰 싸움이 가셨을 뿐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전담 강사를 중심으로 한 라인별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번 논란의 주인공인 곽윤기와 이정수는 각각 연세대학교와 단국대학교 소속으로 과거 기준에서 보면 모두 비한체대 파에 속한다. 그렇지만 전담코치를 보면 곽윤기가 전재목 국가대표팀 코치, 이정수가 이준호 KBS 해설위원으로 각기 다르다. 전 코치는 과거 양대 파벌의 대립이 심각하던 당시 한체대 파벌에 속해 있었고, 이 해설위원은 대표적인 비한체대 인사로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당시에는 한체대파였던 안현수를 제외한 비한체대파인 이호석 오세종 송석우 서호진 등이 이 해설위원에게 큰절을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안현수는 올림픽을 앞두고 훈련조차 남자대표팀이 아닌 한체대파 코치가 있는 여자 국가대표팀에서 해야 했다.
결국 두 계파의 수장들이 화해하며 과거와 같은 파벌 대립은 많이 사라졌지만 전담 코치들 사이의 대립구도나 경쟁관계까지 깨끗이 정리된 건 아니라는 게 빙상계의 지적이다. 일부에선 또 다른 양상의 보다 복잡한 파벌이 지금 쇼트트랙 내부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우려마저 들리고 있다.
만약 실제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밀어주기 담합이 이뤄졌다면 새로운 파벌 구도에서 코치들이 담합해 각자 가르치는 선수들이 골고루 대표팀에 선발돼 돌아가며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도록 시도했다는 얘기가 된다. 국민들이 동계올림픽의 효자 종목인 쇼트트랙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