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오너들이 말로만 책임을 진다는 여론이 높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보여줘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를 바라보는 SK텔레콤 표문수 사장의 표정은 어두웠다.
“형님, 그럼 저도 그만둬야 되는 겁니까?”
곁에 앉아있던 최재원 SK텔레콤 부사장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최 부사장은 곧장 인천공항으로 이동,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최태원 SK(주) 회장(오른쪽 사진)과 손길승 그룹 회장, 표문수 사장(왼쪽), 최재원 부사장이 SK텔레콤 경영에서 동반퇴진해 그 배경에 대한 궁금증이 일고 있다. | ||
서린동 SK그룹 본사에서는 SK텔레콤 이사회가 열렸다. 저녁이 되어서야 시작된 이사회는 조정남 SK텔레콤 부회장의 주재로 시작됐다.
김대식, 김용운, 남상구, 변대규, 윤재승, 이상진씨 등 SK텔레콤의 사외이사 6명이 모두 참석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최태원 SK(주)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SK텔레콤 이사직에서 사임토록 하겠습니다.”
최 회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외이사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최 회장의 사임 얘기가 여러차례 거론된 적은 있었지만, 너무 갑작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후 사외이사들의 충격은 더해갔다.
최 회장은 말을 이어갔다.
“저뿐만 아니라 손길승 회장, 표문수 사장도 동반 퇴진키로 결정했습니다. 이사는 아니지만, 최재원 부사장도 ‘오너 일가’로서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분들의 의사를 대신 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저희를 대신해서 일해주실 이사 세 분을 추천하니 이사회에서 신중히 결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최 회장의 입을 통해 ‘오너 일가의 SK텔레콤 전면사퇴’가 표명되는 순간이었다. 술렁거림은 계속됐다. 몇몇 이사들은 이미 사태를 직감했다는 듯 지긋이 눈을 감았지만, 나머지 이사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다.
사외이사 중 한 명이 최 회장을 향해 물었다.
“사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표문수 사장은 대체 왜 물러나는 겁니까. 표 사장 지금 어디 있습니까? 직접 표 사장을 만나야 겠으니 불러주세요.”
최 회장이 이사회에서 떠난 후 이번에는 표 사장이 이사회장에 들어섰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텔레콤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제는 물러나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표 사장은 사외이사들의 질문을 뒤로한 채 ‘짧은 답변’만을 남기고 서둘러 이사회장을 빠져나왔다.
이후 SK텔레콤의 이사회는 지루하게 계속됐다. 갑작스레 벌어진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서 몇몇 이사들 간에는 의견충돌이 일어, 회의장 밖으로 다투는 소리도 새어 나왔다.
이사회 주재를 맡은 조정남 부회장은 “감정적으로 대처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십시오”라며 이사들을 달래기 위해 진땀을 흘렸다.
오후 5시에 시작된 회의는 오후 10시쯤 끝났다. 같은 시각, SK텔레콤의 일부 임원들도 안절부절못한 채 사무실을 지켰다.
이즈음 SK텔레콤 홍보실은 급히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최태원, 손길승 회장을 비롯해 표문수 사장, 최재원 부사장 등 오너 일가가 일제히 SK텔레콤 이사에서 물러나는 등 경영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SK텔레콤은 “향후 보다 독립적이고 투명한 경영을 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기 위해 오너일가가 전면 퇴진하고, 새로운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소식은 다음날 재계에 퍼지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재계 인사들은 ‘충격적’이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최씨 일가의 선택에 대해 고개를 끄덕였다. H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어떤 식으로든 오너 일가의 결단을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증권시장은 최씨 일가의 퇴진을 반기는 듯 보였다. 이 소식이 전해진 직후 SK텔레콤의 주가는 전날보다 4.65%나 오른 22만5천원에 마감됐다. SK(주)의 주가도 전날보다 무려 6.06% 오른 4만2천7백50원을 기록했다.
하지만 증권시장에서의 이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SK그룹 관계자들은 하루종일 착잡한 표정이었다.
SK그룹의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최태원 회장 등 오너 일가족이 SK텔레콤의 이사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논의된 얘기라는 것.
이 관계자는 “그동안 그룹 내부에서 오너 일가가 어떤 식으로든 특단의 결정을 내려야한다는 얘기는 많았다. 특히 손길승 회장이 구속되면서부터는 그 시기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최 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이라도 치러야 한다는 것이 예전부터 그룹 내부에서 묵시적으로 논의됐다는 얘기다.
그가 선택한 ‘히든카드’가 바로 SK그룹의 주력사인 SK텔레콤의 경영에 일체 관여하지 않는 것인 셈이다. 최태원 회장은 모두를 얻기 위해서는 일단 가진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전략을 짠 것이다.
최 회장의 ‘히든카드’가 다가오는 SK(주)의 주총에서 제대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 새로운 이슈.
그러나 SK그룹의 이 같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오너 일가의 SK텔레콤 동반퇴진’은 또다른 이슈를 생산해 그룹 관계자들이 골머리를 썩고 있다. 최태원 회장의 고종사촌이자 SK그룹의 핵심 경영인 중 한 명인 표문수 SK텔레콤 사장 때문이다.
SK텔레콤의 일부 임원들과 노조측에서 “표 사장은 오너라기보다는 전문경영인의 성격이 강한데 왜 ‘오너 일가 동반 퇴진’에 포함돼야 하느냐”며 반발하고 있다. SK텔레콤 노조는 ‘표 사장 퇴임반대’ 서명운동까지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전혀 뜻밖의 상황. 표 사장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전문경영인이라기보다 오너 일가족으로 여겨온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막상 그가 퇴진을 결정하자 전문경영인으로 돌변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 이 부분에 대해 최태원 회장측도 적잖이 당황하고 있다.
어쨌든 SK그룹 관계자는 “내부에서 우여곡절 끝에 결정한 상황인데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문제가 커지고 있다”고 우려를 표시하면서도 “그러나 오너 일가가 모두 SK텔레콤의 이사직에서 물러난다는 원래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고 명확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