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입었으나 갈 곳이 없다 표지
[부산=일요신문] 행복우물은 이제 작가의 ‘옷을 입었으나 갈 곳이 없다(Jewel Edition)’ 에세이 작품을 최근 출간했다.
출간 전부터 많은 매니아 층을 형성한 이제 작가의 글을 이기준 디자이너의 보석같은 디자인 ‘ Jewel Edition’으로 우선적으로 선보인다.
이병일 시인은 이 산문집에 대해 “문장은 차분하면서도 아름답고 무딘듯하면서도 날렵한 상상력이 수일하다”는 평을 하고 있다.
‘눈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찾겠다며 우리는 하늘을, 구름 사이를 한없이 헤쳐 놓았다. 너를 대신해서 바라볼 것이 있어 다행이었다’라는 작가의 고백처럼, 어느 날 문득 찾아온 꽃잎과 바람 같은, 이 한 권의 산문집이 독자들의 밤을 은은하게 물들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기준 디자이너의 그래픽 아트, 어쩌면 세계 최초로 시도하는 양판면의 텍스트 기울기 달리한 본문, 변칙적인 타이포그래피 또한 독자들에게 새로운 독서 경험과 100% 소장용 도서의 감성을 선물한다.
글의 목차는 ‘밤의 무늬, 깡통 단풍, 시간은 파스스 꺼져가고, 산하엽, 해풍, 헌 애착, 드러낸 살갗, 낱장의 마음, 하드케이스, 수변공원, 숨, 장마에 태어나는 것들, 이틀간의 침묵, 의문의 독자, 벨 포인트와 검은 바다, 잿더미 속 착각이라는 불씨, 모래와 마음이 엉키어, 계절은 퍼즐처럼, 괜찮다고 했잖아요, 몸살, 매일 밤 텔레파시, 서투름, 무인 서울, 겨울은 이렇다, 해 마중, 옥상, 요즘 바쁘시죠, 책 읽는 죄인, 투명한 것에게 묻는다, 70년생이 온다, 질소 중독, 내게 새로운 성처를 줘, 철새, 시커먼 넋, 어떤 관계, 멎는 순간들, 사소한 사랑, 다시 한 살, 현실의 저 반대편, 옷을 입었으나 갈 곳이 없다, 숲에 하는 맹세, 깨끗한 폐가, 죽은 자의 온기가 남아있습니다, 문장의 방, 폭설, 공기의 무게, 누구의 애인도 아닌 혜원, 어떤 사람들은 시를 좋아한다, 구르던 주사위가 멈추고, 선, 안개 마을, 불순물, 인도에서 알게 된 것, 호젓이 헤매는 마음을 나누며, 약속은 어느새 연기가 되고, 해 떨어지는 몽골, 生의 기도, 스물다섯 살 때 나는 잠깐 죽었다, 불가해한 약속, 의심을 깁다, 몽골의 발자국, 시차, 상어도 천진할 수 있다, 우울증이 있는 고양이의 주인 전 상서, 소년 이제, 살아낸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아래는 책 속에서 발췌한 인상적인 문장이다.
눈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찾겠다며 우리는 하늘을, 구름 사이를 한없이 헤쳐 놓았다. 너를 대신해서 바라볼 것이 있어 다행이었다. 32p
우울증 환자들은 우울해지기 위하여 일부러 불행을 택한다고 한다. 내가 그렇게 되어버린 걸까. 우울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우울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우울은 나의 적이 아니라 가까운 친구처럼 느껴졌다. 첼로는 우울을 대신해서 나의 미움을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었다. 29p
나는 네가 걸어가는 것을 보며 네가 밟게 될 돌을 줍고 싶었고, 네가 언제까지고 걸어갈 길을 바라보고 싶었다. 빗소리가 하는 일은 그런 내 마음을 무겁게 적시는 것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도리어 두려워지고 있었다. 35p
세상은 온통 네 이름이었다 / 그 이름이 파도 같아서 /멀리 있어도 바람을 타고 오는 파도 같아서 / 세상은 온통 네 순간이었다 / 내 삶에 갑자기 네가 들어왔던 것처럼 / 그런 순간들은 예고도 없이 / 나를 흔들고는 모른 척했다. 21p
찢어진 틈마다 요란한 외풍을 붙잡고 이 시기를 견디어 내야지. 창틀 위에 버석한 흰 눈을 본다. 뭉쳐지지 않는 흰 눈이나 모락모락 김이 나는 냄비가 슬퍼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방 안에 굴러다니는 빛을 모은다. 일어나 옷장을 연다. 옷을 입었으나 갈 곳이 없다. 97p
김희준 부산/경남 기자 ilyo3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