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죽지 않았다’
▲ LPGA 벨마이크로클래식에서 연장전 끝에 우승을 차지한 박세리가 동료들의 맥주세례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
#성숙해진 언니들
한때 미LPGA를 호령했던 한국 언니들은 나이가 들고, 성적에서 신세대에게 밀리면서 예전과는 사뭇 다른 훈훈한 관계를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선수들이 박세리와 김미현이다. 98, 99년 차례로 미국으로 건너온 박세리와 김미현은 대표적인 라이벌 관계였다. 선수 본인들은 물론이고, 부모들도 서로 까칠했고, 심지어 기자들까지 둘로 쪼개졌다. 그런데 이번 우승 후 박세리는 스스로 “미현 언니(둘은 동갑이지만 김미현이 학교를 1년 먼저 다녀 박세리가 언니라고 부른다)가 해준 닭볶음탕과 꼬리곰탕을 먹고 우승했다”고 밝혔다.
특별히 가깝지 않았던 둘은 벨마이크로클래식 직전 열린 멕시코의 트레스마리아스대회에서 각각 기권과 컷 탈락으로 일찍 보따리를 싸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고, 마침 나란히 앉게 됐다. 오랜만에 김미현의 아이, 남편, 골프 등을 주제로 많은 수다를 떨었고, 둘은 생각지도 않게 강한 친근감을 느꼈다. 이에 벨마이크로대회 동안 한 집을 빌려 함께 지내기로 했는데 이 대회에서 박세리가 우승한 것이다.
비하인드스토리도 재미있지만 박세리가 자신의 우승이 김미현 덕이라고 스스로 밝히는 대목은 과거 이들의 라이벌 관계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정말이지 신선하기만 한 부분이다.
또 한 가지 에피소드도 있다. 정일미는 미국 현지시간으로 우승 다음 날인 5월 17일(월) 박세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먼저 축하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워낙에 큰 우승을 해 정신없이 바쁠 것 같아 미루고 있었는데 박세리가 먼저 전화를 한 것이다.
“언니, 나도 해냈으니까, 이제 언니도 할 수 있을 거야.”
박세리는 축하를 받는 대신 자신의 우승으로 선배를 격려했다. 정일미는 울컥했다. 박세리는 몇 년 전 최악의 슬럼프에 빠졌을 때 “세리야, 이미 너는 최고야. 누구도 부인하지 못 해. 네 골프를 치면 확실히 좋아질 거야. 힘내!”라고 정일미로부터 큰 위로를 받은 적이 있는데 이를 잊지 않고 선배를 챙긴 것이다. 한때 한국에서 최고의 자리를 다투던 선수들이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이제는 서로 격려하고 위로를 하고 있는 것이다.
▲ 김미현, 박지은 |
그럼 언니들의 경쟁력은 어떨까? 나이가 들수록 결혼 등 개인사, 그리고 떨어지는 체력과 비거리 등으로 한창 때에 비해 다소 불리해지는 것도 있지만 오히려 경기운영 등 노련미는 더 강점으로 작용한다. 단, 최근 몇 년간 미LPGA가 대회마다 전장을 대폭 늘린 까닭에 비거리가 짧은 노장선수들이 고전하는 양상이 짙어졌을 뿐이다.
즉, 박세리 외에 김미현 박지은 한희원 등 한국의 1세대 선수들은 향후 얼마든지 톱랭커로 재도약할 수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출산 이후 투어에 복귀한 김미현의 경우 동계훈련은 물론이고, 이렇다 할 연습도 없이 올 시즌 투어로 복귀했지만 4개 대회에서 한 차례 기권했을 뿐 3번은 모두 컷을 통과했다. 특히 전장이 엄청나게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신기의 우드샷과 녹슬지 않은 쇼트게임을 바탕으로 한창 샷 감각을 끌어올리고 있다.
김미현은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딱 하나, 아이 얼굴이 너무 보고 싶다는 것을 제외하면 큰 문제가 없다. 태어나서 이렇게 연습하지 않고 대회에 다니기는 처음인데 그래도 할 만하다”라고 말했다.
박지은은 더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허리수술 관계로 아예 시즌을 접은 박지은은 원래 장타자로 유명했던 까닭에 ‘올드타이머’ 중 길어진 신세대 코스에 가장 잘 적응할 고참으로 평가받는다. 스스로도 “요즘은 자신감이 넘친다. 거리도 신세대에게 뒤지지 않는다. 아직 투어에 복귀한지 얼마 안 돼 감각이 떨어져서 그렇지 곧 좋은 성적을 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박지은은 한 차례 우승한 바 있는 나비스코챔피언십에서 4언더파를 몰아치는 등 톱10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수술 및 재활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친 까닭에 올 시즌 중반 이후에는 ‘아마조네스’의 부활도 예상되는 것이다.
이밖에 ‘1호 미시 골퍼’로 유명한 한희원도 벨마이크로에서 12위에 오르는 등 꾸준한 성적을 내고 있고, 강수연 정일미 등도 좀처럼 컷 탈락을 당하지 않으며 상위권 도약을 노리고 있다.
미LPGA 최고참 매니저인 송영군 씨는 “워낙 한국선수들의 성적이 좋아서 그렇지 박세리 프로의 경우 최근 2년간은 슬럼프라고 할 수 없다. 우승이 아니면 부진한 것으로 파악하는 한국 정서가 지나친 것”이라면서 “LPGA 풀시드 멤버라면 언제든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강조했다.
#언니들의 고민
이런 ‘언니’들의 고민은 골프가 아닌 코스밖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박세리는 4년째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토미 김)와 결혼을 아직 부모로부터 승낙을 받지 못했다. 일단은 골프에 전념하고 있고, 1~2년 내에 결혼을 하고 또 결혼 후에도 계속해서 투어생활을 할 생각이다. 박지은도 이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적지 않은 나이인 정일미 강수연은 결혼, 가정 등 개인적인 삶을 아예 뒷전으로 미루고 골프에 매진하고 있다.
김미현 한희원 박희정 등의 경우는 ‘육아 문제’가 고민이다. 아무래도 연습시간을 확보하고, 투어생활에 전념하는 데 시간적으로 마이너스 요인일 수밖에 없다. 아주 어렸을 때는 투어에 데리고 다닐 수도 없고, 또 조금 크면 교육 등의 문제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남편이나 아이와 떨어져 사는 것도 힘든 노릇이다.
결국 여자선수는 20대 중반이 전성기라는 속설도 결국 남자들에 비해 결혼 및 육아 등으로 인해 투어에 전념할 수 없는 골프 외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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