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판장 돌려봐라 꿈쩍이나 하나
▲ 6·2 지방선거 참패 후 여권의 초선의원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정풍운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이에 이 대통령이 소장파들의 ‘거사’에 불쾌한 반응을 보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양측 간의 갈등도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처음부터 소장파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소장파가 청와대에 대대적 인적쇄신을 요구하면서도 그들 스스로 마련해놓은 인사에 대한 대안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장파의 쇄신 요구가 그들을 옥죄는 올가미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크다.
이 대통령도 지방선거의 패배 원인 분석과 무관하게 걸핏하면 대안도 없이 터져 나오는 소장파의 ‘습관성’ 쇄신요구에 정면 대응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소장파 진압작전’ 이면을 따라가 봤다.
6·2 지방선거 참패 뒤 한나라당은 패닉 상태에 빠져 들었다. 특히 이번 지방선거의 기초단체장 당선 결과를 기준으로 국회의원 지역구별로 나누거나 합쳐서 선거 시뮬레이션을 해본 결과 ‘125(민주당) 대 83(한나라당)’인 것으로 조사되자 충격에 빠진 모습이다. 여기에 비례대표를 합칠 경우 지난 2004년 탄핵 이후 총선 때의 수치와 비슷하거나 더 못한 것으로 나타나 상당수 의원들이 “이러다가 총선에서 다 죽게 생겼다”라며 청와대 참모들에 대한 대대적 인적쇄신과 이명박 대통령의 ‘자세변화’를 촉구하고 나섰다.
특히 수도권 초선의 경우 친이-친박계 모두 거의 한목소리로 정풍운동에 가담하고 있다. 친박계 핵심인 구상찬 의원과 친이계 정태근 의원이 주도하고 김성식 김학용 박영아 의원 등 5명이 주축이 된 ‘한나라당 쇄신을 촉구하는 초선의원모임’(초선 쇄신 모임)은 50여 명의 의원들로부터 연판장 사인을 받고 향후 활동도 지역별로 조직적으로 전개해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철옹성처럼 버티고 서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월 3일 지방선거 패배와 관련, 딱 한 차례 “이번 선거결과를 다함께 성찰의 기회로 삼고 경제 살리기에 전념하자”라고 언급했다. 그의 발언은 듣기에 따라 “가던 길로 계속 가겠다”는 쪽으로 해석돼 소장파의 ‘거사’에 불을 붙이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이 대통령은 계속 시간을 끌며 소장파의 쇄신요구에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청와대 측은 이에 대해 “대통령이 가만히 있는 건 쇄신과 관련해 아직 대안이 없고, 준비가 잘 안 됐기 때문”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수습 과정에서 청와대 A 수석이 소장파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선봉장으로서 맹활약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미션’을 받은 듯 A 수석은 선거 패배 며칠 뒤부터 공격적인 대응으로 소장파를 ‘무력진압’하려고 한다.
청와대 사정을 잘 아는 한 여권 관계자는 이에 대해 “선거 패배 뒤 모든 화살이 이 대통령과 A 수석에게로 쏠렸다. 처음에는 A 수석도 민감한 사안에 대해 거의 발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뒤부터 A 수석의 발언 강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당에서 이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로막고 있는 대표적 참모로 통한다. 지방선거에 패배한 뒤에도 그는 ‘나로호와 월드컵 16강 진출 등과 같은 호재를 활용한다면 그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나로호 발사는 실패로 돌아갔고, 월드컵 성적도 변수가 많아 확실치 않기 때문에 그의 바람이 이뤄지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소장파의 쇄신요구에 대한 이 대통령의 첫 반응도 A 수석을 통해 흘러나온 것으로 알려진다. 이 대통령은 최근 소장파들의 연판장 파동 등을 지켜보면서 “초선들이 정치를 잘못 배운 것 같다”라는 말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의 이 발언을 언론에 흘린 장본인이 A 수석으로 알려지면서 그 ‘정치적 의도’에 대해서도 삐딱한 시선이 쏠리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의원은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고, A 수석이 대통령 입을 빌려 자신의 말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더라. A 수석이 소장파의 순수한 쇄신 요구를 정파적으로 해석하고 대통령 발언 운운하며 정풍운동 세력을 협박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라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A 수석은 이에 대해 ‘그런 얘기 전할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누가 했을까’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전언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이 대통령의 문제 발언에 대해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않고 ‘적당히’ 넘어갔다. 흔히 나오는 보도 자료도 없었다. 만약 이 대통령의 말이 사실이라면 여당 초선 의원들을 허투루 보는 대통령의 이미지에 상당히 타격이 갈 만도 하지만 청와대는 ‘모른 척’ 넘어가고 있다. 청와대 일각에서는 “빨리 월드컵이라도 열렸으면 좋겠다”라는 안일한 자세마저 보이고 있다. 월드컵 한 달 동안 지방선거의 패배가 희석되면서 소장파의 쇄신요구도 자연히 ‘축구’에 묻힐 것이라는 희망 섞인 전망도 내놓고 있다.
그런데 여당 일각에서는 청와대 A 수석을 중심으로 하는 여권의 반 정풍운동세력이 ‘경제지표가 나아지고 있다는 쪽으로 계속 홍보를 강화하고 막강한 국회 의석수를 바탕으로 시간을 끌어 올해 11월 G20 개최를 집중 부각시키면 이 대통령도 선거의 패배 후유증에서 빠져나와 다시 상승세를 탈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하지만 전면적 인적 쇄신과 당·청 간 시스템 개편 등의 근본적 변화를 외치는 소장파의 외침을 무색케 하는 이런 대증요법이 과연 먹혀들 것인지, 청와대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일단 시간벌기에 성공한 이 대통령은 두 번째 단계로 ‘거사’를 주도하고 있는 소장파 각개격파에도 나서고 있다. 현재 청와대 정무라인은 여권의 모든 인적 루트를 통해 소장파 핵심인사들에 대한 대인 마크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다. 연판장에 서명한 초선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활동에 대해 은근히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실제로 한 소장파 의원은 이에 대해 “청와대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당 쪽에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걱정한다는 취지로 조언을 해 오는데 그것이 직·간접적인 압력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라고 말했다. 전화공세뿐 아니라 사적인 인맥을 동원해 다양한 방법으로 소장파의 쇄신운동을 방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더욱이 초선들은 연판장에서 이 대통령의 일방통행식 국정운영 중단, 세종시·4대강에 대한 민심 적극 수용, 신속한 당·정·청 전면 물갈이 등을 요구했는데 이는 이명박 정권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관철시키기가 쉽지 않다. 또한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정당 득표율이 대부분의 지역에서 민주당을 앞서고 있는 점(16개 지역 중 9:5로 민주당을 앞섬)도 이 대통령이 쉽게 굴복하기 어려운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세 번째로 이 대통령이 지난 지방선거 때 잠시 기용했던 소장파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거둬들이고 믿을 만한 중진그룹을 다시 기용할 가능성을 들 수 있다. 한나라당의 한 친이 직계 재선의원은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걸핏하면 대안도 없이 쇄신운동을 벌이고 있는 소장파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다. 대통령의 철학을 가장 잘 이해할 듯한 인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활로를 확보하기 위해 대통령을 흔들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또한 이 대통령은 자신이 시키는 일을 제대로 잘 해내는 인물을 선호하고, 그에게 반기를 들고 개인 정치를 일삼는 사람을 굉장히 멀리하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이번 소장파 쇄신운동도 이 대통령에게는 눈엣가시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의 소장파에 대한 근본적 인식이 바뀌지 않을 경우 그들의 쇄신운동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소장파에 대한 불신은 여권의 권력 구도를 또 다시 정권 초기처럼 중진그룹의 요직 포진 쪽으로 되돌릴 수 있다. 지방선거 패배의 와중에 신임 사무총장으로 이 대통령의 고려대 후배이자 포항 지역구의 이병석 의원(3선)을 ‘내정’한 것이 그 시그널로 해석된다. 애초 소장파의 원희룡 의원이 유력했지만 이 대통령이 직접 이 의원을 ‘낙점’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중진그룹의 재기용은 향후 하반기 국정운영이 레임덕에 빠져 헤맬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인물 중용으로 위기를 극복해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7·28 재·보궐 선거 전 청와대 조직개편, 8월 개각’이라는 순차적 쇄신작업을 통해 지방선거 패배의 후유증을 치유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소장파가 지방선거 패배를 통해 내걸었던 민의는 상당부분 희석될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이 대통령의 소장파에 대한 반격작전이 먹혀들 경우 당장 숨통은 틔겠지만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는 또 다시 국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에 직면해 숨쉬기조차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