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는 너무 쉽게 그녈 벗겼다
강리나에게 영화배우는 꿈도 목적도 아니었다. 선화예고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에 진학할 때만 해도 그녀는 아티스트였다. 그림 그리는 재료를 살 돈을 벌기 위해 1986년에 CF 모델 일을 시작했고 패션쇼에 갔다가 우연히 영화 관계자의 눈에 뜨이면서 배우가 된 것이다. 한두 편의 아동 영화에 출연한 그녀에게 찾아온 본격적 계기는 이대근 신성일 같은 충무로의 거물들과 공연했던 <대물>(1988). 이 영화에서 그녀는 이대근과의 정사신을 해낸다.
‘강리나’라는 이름이 대중들에게 각인된 계기는 <서울 무지개>(1989)였다. ‘어르신’의 도움으로 스타가 되는 ‘유라’ 역을 맡은 그녀는 이 영화로 대종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몸을 사리지 않는 과감한 연기로 각광받았다. 윤간을 당하는 장면에선 위스키 한 병을 다 마신 후 촬영에 임했다는 건 유명한 에피소드. 이후 그녀는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여배우가 된다.
그의 이미지는 당시 마광수 교수가 말하던 ‘야한 여자’를 연상시켰다. 강리나는 그 어떤 역할을 맡아도 자신만의 뚜렷한 색채를 캐릭터에 입혔다. 그녀가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는 한국영화의 에로티시즘이 말기 증상에 접어든 시기였지만 그녀가 소화한 섹슈얼리티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었다. 절대자의 욕망에 의해 착취당했던 <서울 무지개>, 지적이면서도 섹시했던 <클라이막스 원>(1989), 팬시한 도시 여성이었던 <러브러브>(1991), 백치미의 정점을 보여주었던 <변금련>(1991), 원숙한 에로티시즘을 보여주었던 <빠담풍>(1992), ‘정인숙 사건’을 모티프로 했던 <나는 너를 천사라 부른다>(1992) 등등. 이 시절 그녀는 최고의 다작 배우였으며 최고의 성격파 배우였다.
강리나가 이전의 여배우들과 가장 달랐던 부분은 ‘성’을 유쾌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녀의 성은 음습하거나 운명적인 그 무엇이 아니었다. 한희작의 <러브러브>나 배금택의 <변금련> 같은 당대 최고의 성인 만화 캐릭터의 영화 버전에서 주인공을 맡을 수 있었던 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강리나에겐 만화의 성적 판타지를 육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과장되고 황당하며 때론 엽기적이었던 성적 콘셉트를 큰 무리 없이 소화했다. 그런 면에서 <서울 무지개>에 버금가는 강리나의 대표작은 <변금련>일 것이다. 순진한 시골 여자가 마초적이며 성폭력적인 사회에서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에서 그녀는 청순하면서도 극도의 성감을 지닌 캐릭터로 사랑받았다.
강리나는 결코 에로 영화에 한정된 배우가 아니었다. 코믹하면서도 퇴폐적이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지녔던 그녀의 연기는 다듬어지지 않았기에 대담했고 오히려 슬픈 정서를 표현할 때 더 큰 호소력을 지니기도 했다. 하지만 1996년에 <알바트로스>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도전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영화계를 떠나 아티스트의 길을 걸었다. 사실 강리나의 외도(?)는 이전부터 있었다. 1988~89년엔 여성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고, 1992년엔 바쁜 와중에도 연극 <루브>에 도전했으며, 영화 현장에선 미술 팀 일에 참여하기도 했다. 배우 활동을 하면서도 화실 작업을 병행했던 그녀는 은퇴를 앞둔 1995년엔 지상파와 케이블을 아우르며 각종 토크쇼의 MC로 활동했고, TV 드라마 <국화와 칼>(1995)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은퇴 후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에 대해 보수적이던 1980~90년대, 영화 속 인물과 동일시하며 ‘저급하다’ ‘저질스럽다’ 등의 수식어가 나에겐 끊이질 않았다. 한 번에 목돈을 만질 수 있다는 사실 외에 배우로서의 삶은 잔인하리만큼 가혹했다. 연기에 대한 지식과 배움이 전무했던 나에게 카메라는 마치 총구 같았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이 두려웠다.”
미적으로 “다르게 벗고 싶다”던 전무후무한 개성과 섹시함을 지닌 그녀를 당시의 충무로는 너무 낮은 수준으로 쉽게 이용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