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마님 놀이터 때론 검은돈 창구
▲ 2008년 삼성특검팀이 S 갤러리에서 ‘행복한 눈물’ 진위 여부를 조사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이들 사모님들에게 ‘갤러리’는 유력 인사들과의 사교모임의 장소로 활용됨은 물론이고 때로는 남편들의 ‘민원’이 오가는 창구가 되기도 한다. ‘도’가 지나치면 ‘화’를 불러오는 법. 최근 들어 일부 ‘갤러리’들은 사정기관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삼성특검 당시 S 갤러리가 그랬고, 안원구 전 국세청 국장의 부인이 운영한 G 갤러리도 그랬다. 최근에는 이명박 정부의 실세로 불리는 모 인사의 아내가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실세 아내들 간에 언성이 높아지는 사건도 발생했다고 한다. 정치권 구설의 중심에 선 갤러리의 모든 것을 취재했다.
‘갤러리’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미술품을 진열·전시하고 판매하는 장소’란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최근 정·재계나 관계에서 사용되는 ‘갤러리’의 의미는 ‘유력 인사의 아내들 사이에서 미술품을 매개로 로비가 이뤄지는 장소’란 뜻으로 더욱 그럴듯하게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언론의 주목을 받은 굵직한 사건을 쫓아가다보면 ‘갤러리’란 장소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건의 배경으로 ‘갤러리’가 가장 많이 등장했던 곳은 다름 아닌 ‘삼성 비자금’ 사건이다. 지난 2008년 삼성그룹과 관련한 각종 비자금 의혹을 수사했던 이른바 ‘삼성특검’은 2006년과 2007년 여러 차례에 걸쳐 삼성 돈 110억 원이 종로구 K 갤러리로 흘러들어간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삼성특검은 삼성그룹의 또 다른 비자금 창구로 알려진 S 갤러리에 대해서도 수사를 진행했었다. 당시 S 갤러리를 통해 거래된 ‘행복한 눈물’이란 미술품은 언론의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아직까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그림 로비’ 사건에서도 어김없이 갤러리가 등장한다. ‘그림 로비’는 전군표 전 국세청장의 부인이 지난해 1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07년 한 전 청장 측으로부터 인사 청탁과 함께 최욱경 화백의 그림 ‘학동마을’을 선물받았다”고 폭로하면서 수면위로 부상한 사건이다. 당시 한 전 청장의 비서 장 아무개 씨는 K 갤러리에서 그림을 사서 전 전 청장 쪽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 S 갤러리 전경. |
그러나 당시 참여한 또 다른 정치권 유력인사 C 씨의 아내와 A 씨 아내 간에 사소한 문제로 큰 싸움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욕설까지 오가는 낯부끄러운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
두 사람은 당시 참석했던 사람들의 만류로 화해했으나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치권에서 A 씨와 C 씨는 아주 가까운 사이로 알려졌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두 사람이 상당히 민망해했다는 후문이다. C 씨의 아내 역시 청담동에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유력 인사 사모님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갤러리를 운영하는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이들 중에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나 사정기관 관계자들은 대개 두 가지 정도를 주된 이유로 꼽는다.
하나는 과거 프랑스 귀족 부인들이 ‘살롱’(SALON)을 중심으로 모여 친교를 나눴던 것처럼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갤러리’가 비슷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삼성특검의 수사를 받았던 S 갤러리의 경우 재벌가 사모님들의 부동산 및 고가 미술품 거래의 중개처로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일요신문>이 확인한 이 회사의 지분 내역을 살펴보면 재벌가 안주인들의 이름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 갤러리를 오가는 인사들 중에는 유명 연예인들의 아내도 적지 않다. 특히 유력인사들은 미술품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기 때문에 ‘갤러리’는 자연스럽게 유력인사들의 집합소가 될 수밖에 없다.
미술품 거래는 세금 징수가 거의 불가능하다. 상속이나 증여할 때는 과세대상이지만 등기를 할 필요가 없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세금 납부를 피할 수 있다. 국내 작품의 경우 음성적으로 거래되는 경우가 많아 구입자를 확인하기도 쉽지 않다. ‘한상률 그림 로비’ 사건에 등장했던 ‘학동마을’의 경우 당시 거래가격과 현재가를 파악하는 것이 수사의 주된 포인트가 될 정도였다. 정확한 가격을 매기기 어렵기 때문에 거액의 재산을 미술품으로 바꿔 세금 없이 상속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모님들 사이에서 ‘갤러리’ 운영이 인기를 모으는 또 다른 이유는 ‘갤러리’ 만큼 민원창구로 적합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안원구 전 국세청 국장이 검찰에 기소된 이유도 지난 2006년~2008년 모 건설사로부터 세무조사에 대한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부인이 운영하는 갤러리를 통해 36억 원 상당의 미술품을 구매하거나 조형물을 설치하도록 계약을 체결한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때 국세청 고위직 인사의 아내들이 갤러리를 소유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안 전 국장 사건이 터지면서 대부분 정리했다는 후문이다.
갤러리를 이처럼 사교모임이나 민원창구로 활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정·관·재계에 인맥을 쌓게 되는 것이다.
흔치 않은 경우지만 이외에도 ‘갤러리’는 비자금 세탁 창구로 활용되기도 한다는 주장도 있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마련한 비자금을 안전하고 모양 좋게 묻어두기에는 미술품만 한 게 없다는 것이다. 특히 기업이 세운 미술관의 경우 작품 구입비를 부풀려 차액을 비자금으로 만든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바로 이런 점들이 유력인사 아내들이 운영하는 갤러리에 대해 미술계 안팎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유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