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동’도 안걸었는데 소문은 고속주행
▲ 현대건설 인수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정몽구 현대ㆍ기아차 회장. |
지난 6월 29일 현대건설 매각 주관은행인 외환은행은 정책금융공사, 우리은행 등 채권단이 현대건설 인수·합병 동의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채권단은 운영위원회를 열고 매각자문사 선정 작업에 들어가는 등 매각을 위한 실무절차에 돌입한 상태다. 매각 작업이 중단된 지 4년 만에 현대건설이 다시 매물로 시장에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현대건설 매각 추진 소식에 맞춰 터져 나온 ‘현대가 내부 합의설’이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재계와 금융권에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그리고 KCC 등 현대가 그룹 오너들이 만나 현대건설 인수전에 현대차가 나서고 현대중공업과 KCC가 이를 적극 밀어주기로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것이다.
그동안 증권가에선 “현대가 장자인 정몽구 회장이 현대건설 인수전에 나서는 게 정부와 채권은행이 내심 바라는 시나리오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오르내렸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현대건설 인수 의지를 드러내 왔지만 다른 현대가 기업들에 비해 자금력에서 달린다는 평가가 뒤따랐던 까닭에서다.
현 회장의 현대건설 인수 의지에 대해 현대중공업 대주주인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 등 현대가 인사들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여권 핵심세력으로 성장한 정 의원이 현대건설을 인수할 경우 특혜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농후한 까닭에 현대중공업이 현대건설 대신 지난해 현대종합상사를 인수한 것이라 보는 시선도 있다. 결국 ‘정씨 현대’ 일가에서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혼이 깃든 현대건설을 현 회장 측에 넘기지 않기 위해 현대가 적통 장자 명분을 지닌 정몽구 회장이 나서는 게 가장 낫다는 판단을 했을 것으로 비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현대차 측은 “현대가 일원들이 현대건설 문제로 모인 일이 없다”며 “모인 적이 없는데 무슨 합의를 했겠느냐”고 반문한다. 현대차 관계자는 “(현대차에선) 현대건설 인수와 관련된 어떤 결정도 내린 게 없다”고 밝혔다. 더불어 현대차 측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장자인 정몽구 회장과 며느리 현정은 회장이 집안다툼을 벌이게 됐다’는 식의 해석에 무척이나 불편한 기색을 보이고 있다.
정몽구 회장은 그동안 가문의 맏형답게 가족 간 화합과 의리를 강조하면서 현 회장에게도 온정적 태도를 취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현대건설 인수 의지를 불태워온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정몽준 의원이나 정상영 KCC 명예회장 등과는 갈등을 빚어왔어도 정몽구 회장에게만큼은 깍듯했다. 이런 까닭에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정몽구 회장이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가 큰 관심을 끌어온 것이다.
이런 와중에 ‘현대차가 현대건설 인수 선봉에 설 것’이란 관측이 수면 위로 급부상한 점은 분명 현대그룹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다.
현대그룹은 안 그래도 최근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으로부터 재무구조개선약정(재무약정) 대상 통보를 받은 상태다. 재무약정 대상으로 선정되면 고강도 구조조정과 재무구조 개선 작업을 피할 수 없는 만큼 현대건설 인수전에 필요한 수조 원의 자금을 동원할 길이 막막해진다.
이런 까닭에 재계와 금융권 일각에선 “외환은행의 현대그룹 재무약정 대상 선정 배후에 현대가가 있다”는 식의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외환은행은 현대그룹 계열사들뿐만 아니라 현대차 현대중공업 등의 주거래은행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도 현대차 측은 “뭘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그냥 만들어낸 소리”라며 펄쩍 뛴다.
재계와 금융권에선 만약 현대차가 현대가의 지원을 받아 현대건설 인수전에 나선다면 현대그룹에 비해 자금력 등에서 월등히 앞설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이 나선다고 해서 현대건설 매각 일정이 잡음 없이 순항할 거라 단언할 수는 없다. 지난 2006년 채권은행이던 산업은행(현재 정책금융공사가 승계한 상태)이 옛 사주의 입찰 자격 문제를 거론하면서 결국 현대건설 매각이 중단된 전례가 있다. 외환은행에 주거래은행 변경을 요구하며 재무약정 이행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현대그룹에 대한 재계와 금융권의 동정론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그러나 현대건설 인수 금액 3조~4조 원을 동원할 단일 기업이 흔치 않은 까닭에 채권단이 ‘현대가의 현대차 밀어주기’ 시나리오가 현실화되길 바랄 것이란 지적에도 귀가 기울여진다. 현대가에선 계속해서 부인하지만 현대건설 인수를 둘러싼 현대가 합의설을 향한 재계와 금융권의 시선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