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당부’ 영향 분석에 대한통운 “사실무근”…분류인력 비용 500억 결국 택배 노동자가 부담 우려
지난 10월 22일 CJ대한통운이 서울 중구 태평로빌딩에서 택배 노동자 사망 사건과 관련해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부터 박근희 CJ대한통운 대표이사, 정태영 CJ대한통운 택배부문장, 최우석 CJ대한통운 택배본부장, 한광섭 CJ대한통운 커뮤니케이션실장. 사진=박정훈 기자
#돌연 입장을 바꾼 배경에 윗분들이?
10월 22일 택배업계 1위인 CJ대한통운이 택배기사 과로사에 대해 사과하며 재발방지 대책을 발표했다. 이날 박근희 CJ대한통운 대표는 고개 숙여 사과했다. 한광섭 커뮤니케이션실장, 최우석 택배본부장, 정태영 택배부문장도 함께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CJ대한통운은 우선 매년 500억 원을 투입해 택배기사의 인수업무를 돕는 분류지원 인력 4000명을 11월부터 단계적으로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집배점과 택배기사가 자체적으로 운영 중인 현장 근무인력 1000명을 포함한 규모다.
당초 CJ대한통운은 분류작업을 택배기사의 일이라며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지난 9월 17일 4000여 명의 택배기사가 분류작업을 거부하며 파업을 예고했다. 하지만 CJ대한통운은 ‘상품을 인수하는 작업은 하나의 묶음 작업’이라는 대법원 판례를 들어 반박했다. 당시 추석을 앞둔 파업 예고에 물류 대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정부까지 나서서 절충안을 제시했고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에서 이를 받아들이면서 파업이 철회됐다.
CJ대한통운이 갑자기 입장을 바꾸고 대표부터 임원들까지 사과문을 발표한 배경에는 청와대의 당부가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청와대의 한 인사가 CJ대한통운 임원을 접촉해 “올해만 과로사로 추정되는 택배노동자가 10명 이상 발생하면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며 “택배업계 1등 기업이 먼저 사과하고 문제 해결에 나서주면 좋겠다”라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알려져다.
앞서 10월 20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회의 모두 발언에서 택배기사들의 과로사 문제를 언급하면서 “더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치 않도록 특별히 대책을 서둘러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날 CJ대한통운 커뮤니케이션팀은 10월 22일 기자들에게 박근희 대표의 사과문과 함께 택배기사 및 택배종사자 보호를 위한 대책 발표 시간을 갖는다고 알렸다.
실제 업계 1위의 사과를 시작으로 택배업계는 연이어 대책을 발표했다. 지난 10월 26일 한진과 롯데글로벌로지스가 택배기사 과로방지를 위한 대책을 내놨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작업환경 개선을 위해 터미널 자동화 시설에 투자하고 분류지원 인력을 상황에 맞춰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연간 건강검진, 산재보험 100% 가입 등 택배기사 건강보호 조치도 마련한다. 한진의 경우, 지난 11월 1일부터 심야배송을 중단했고 당일 미배송물량은 다음날 배송하도록 하고 있다.
이와 관련, CJ대한통운 관계자는 “코로나19에 고생하시는 택배기사님들의 과로사 문제에 대한 사과와 대책 방안은 오래전부터 고민해온 바를 발표한 것”이라며 “청와대에서 개입했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라고 선을 그었다.
지난 6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분류지원 인력 투입비용 누가 떠안나
문제는 시스템 개선에 필요한 자금을 누가 부담하느냐이다. CJ대한통운은 분류지원 인력 투입 비용 500억 원의 절반을 대리점주에게 부담시킬 방침이다. 대리점주들을 설득하는 것이 숙제다. 택배업계 한 관계자는 “CJ대한통운은 택배기사의 트럭 앞까지 물류를 자동으로 분류해서 놓아준다”며 “차 앞에 있는 물량을 싣는 비용까지 투입하는 것을 대리점주들이 납득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택배기사들은 분류지원 인력 투입비용을 전가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지난 11월 5일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는 “하루아침에 분류작업 비용을 떠안은 대리점들은 그 비용을 택배노동자들에게 전가시킬 것이 불 보듯 빤하다”며 “특히 노조에 가입한 택배노동자가 적거나 없는 대리점일수록 비용 떠넘기기 상황은 심각하다”고 주장했다.
앞서의 CJ대한통운 관계자는 “500억 원 인력투입 비용에 대해 전국에 있는 대리점과 협의 중”이며 “분류인력 투입에 대한 비용을 기사들에게는 절대 분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21일 서울 서초구 CJ대한통운 택배물류현장에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들이 최근 택배노동자가 숨진 사건 등과 관련해 현장 시찰을 했다. 사진=국회사진취재단
#근본적인 원인과 대책은 ‘택배비’로 귀결
우리나라 택배 단가는 해외 선진국과 비교하면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택배 단가는 해마다 떨어지다가 지난해 소폭 올라 박스당 평균 2269원이다. 택배기사들은 배송 건수에 따라 수익을 받는다. 한 건당 약 700원으로 추정된다. 배송 건수가 수익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장시간·저임금 근무환경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택배기사들이 ‘초과물량 공유제’ 도입을 마냥 반길 수 없는 이유다. 초과물량 공유제는 하루 정해진 물량을 초과하면 다른 직원과 물량을 공유하는 방식이다.
택배회사도 상황이 녹록지 않다. 택배회사, 유통업체, 대리점, 택배기사 등 여러 곳에서 택배 단가 2269원을 나눠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대규모 물량을 공급하는 유통업계의 물량을 따내기 위해서 ‘택배비 백마진’(리베이트)을 지급하는 관례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실제 국내 택배회사의 영업이익률은 평균 3%대에 불과하다. 적자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곳도 있다. 2017년부터 현재까지 롯데글로벌로지스는 택배사업에서 누적 적자가 약 438억 원에 달한다. 우정사업본부 우편사업(우체국)은 2011년 439억 원의 적자를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9년 연속 적자를 내면서 누적 적자가 6072억 원에 달한다. 올해도 적자가 예상된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관건은 저렴한 택배 단가다. 이커머스 등이 당일·새벽 배송 서비스를 너무 헐값에 제공하고 있어 문제다. 택배기사들이 받는 수수료를 현실화하고 중간 단계에서 백마진을 받는 행위를 근절해야 된다”며 “소비자와 사용자가 50%를 부담하는 게 합리적이지만, 이게 현실화되긴 쉽지 않다. 정부에서 시장 가격에 개입할 수는 없지만, 2년간 보조금을 지급하고 택배업계에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