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방관? 거기서 날 읽어내라’
▲ 지난 14일 제11차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친박계는 서병수 의원 단 한 명만이 지도부에 입성한 가운데, 박 전 대표의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하지만 이런 지도부의 ‘친이 싹쓸이’(최고위원 5명 중 4명이 범 친이계)는 박근혜 전 대표를 위시한 친박계를 더욱 옥죌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박 전 대표는 총선 공천 등을 결정할 새 지도부에 친박계도 적극 참여시켜야 한다는 일부 중진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끝내 전당대회 ‘개입’을 외면했다.
친박계의 위축은 박 전 대표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향후 그의 대권 행보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친박계 일각의 계속된 ‘전면 등장’ 요구에도 불구하고 계속 뜸을 들이다 결정적으로 실기를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박 전 대표의 당권 의지 부재에 대해서도 “향후 탈당을 하기 위한 몸 풀기 수순이 아니겠느냐”라는 의견마저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 전당대회가 가져온 여권의 대권 구도 지형 변화를 따라가 봤다.
이번 전당대회 결과의 최대 미스터리는 친박계의 ‘석연치 않은 패배’다. 친박계는 이번 전대에 총 4명이 후보로 나섰지만 서병수 의원만 5위로 겨우 턱걸이를 했다. 나경원 후보에게도 뒤져 여성 몫으로 ‘간신히’ 지도부에 입성한 셈이다. 선거가 끝난 뒤 친박계 내부에서는 진한 아쉬움이 배 나왔다. 사전에 교통정리만 했어도 참담한 패배는 면할 수 있었다는 후회 때문이다. “파이도 작은 데서 우리끼리 아옹다옹 싸우다 결국 이런 결과를 자초하고 말았다”는 만시지탄도 터져 나온다.
친박 후보들은 서 의원이 5위를 한 것을 비롯해 이성헌 6위, 한선교 7위, 이혜훈 8위로 나란히 중위권을 차지하며 전체 득표율의 26.7%를 얻었다. 1위를 차지한 안상수 대표(20.3%)보다도 높은 득표율이다. 교통정리에 성공했더라면 더 나은 성적표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란 분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결국 ‘계파 내 후보난립으로 지리멸렬을 자초했다’는 비판이 불가피해 보인다. 이는 향후 친박 내부의 책임 공방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강경파 안상수 대표가 당권을 차지해 정국 주도권 경쟁에서 밀릴 가능성이 큰데 ‘내부 분란’까지 겹쳐 지리멸렬한 상태를 드러낸 것도 우려스럽다. 특히 지도부 5명 가운데 4명이 친이계라는 점에서 향후의 총선 공천과 대선 후보 경선 관리 정국에서도 선제권을 뺏겼다는 우려는 매우 뼈아픈 대목이다.
▲ 제11차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당선된 안상수 신임 당대표. |
그럼에도 박 전 대표의 ‘당권에 대한 자제 내지는 부재’(선거 결과에 대한 원희룡 의원 분석)는 그가 이미 장기 정국에 대한 수읽기를 끝내고 내린 특단의 대책이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박 전 대표가 이미 정계개편을 대비한 포석에 들어갔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박 전 대표는 평소 한나라당에 대한 오너 의식이 상당히 강하다고 여러 차례 언급해왔다. 하지만 이번에 전당대회에서 보여준 당권에 대한 포기는 ‘이미 그의 마음이 한나라당을 떠났다는 방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친박계 대의원들은 이번 선거에서 어떤 오더도 받지 못하고 ‘자유 투표’를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박 전 대표로서는 향후 정계개편 과정에서 탈당을 결행할 경우에 대비해 최대한 행장을 가볍게 해두어야 한다. 한나라당 지도부에 친박계가 다수 포진해 있으면 분당의 책임을 같이 져야 하는 부담이 있다. 최대한 지도부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놔야 이탈이 용이하고 책임론 공방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친박 진영 일각에서는 “신당 창당에 대한 구체적 검토를 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의 레임덕이 더 가속화되면 박 전 대표도 같이 죽는다. 이제 미련 없이 연결고리를 떼 내자”라는 의견이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박 전 대표의 탈당 정국이 조성될까. 여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친이계에 의해 자연스러운 분당 정국이 조성되면 그도 미련 없이 당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친이계의 분당 전략은 두 가지다. 안상수 신임 대표는 취임 첫 일성으로 ‘개헌론’을 내걸었다. 그것도 박 전 대표의 ‘대통령 중임제’가 아닌 친이계의 ‘분권형 대통령제’를 구체적으로 거명했다. 정치권에선 안 대표의 개헌론 제기를 그 실현 여부를 떠나 제2의 세종시 정국 조성으로 보고 있다. 박 전 대표가 견디지 못하고 탈당을 결행할 국면을 조성하려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보수대연합’ 정국도 친이 직계가 만들 수 있는 히든카드다. 안 대표는 취임 후 이회창 선진자유당 대표를 예방한 자리에서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이 총재께서 정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퇴보한 것 같다. 그 때 대통령을 했으면 정말 잘 했을 것”이라며 코드를 맞추는 데 주력했다. 보수대연합론의 경우 6월 지방선거 직후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가 제기한 이후 한나라당 지도부 등에서 호응하고 있는 상황이다. 친이계로서는 보수대연합론이 박근혜 전 대표를 견제할 수 있는 매력적인 카드다. 세종시 문제로 잃은 충청 민심을 이 대표를 통해 되찾아오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여기에다 합당까지 이어질 경우 최후의 카드로 이회창 대표를 박 전 대표의 대항마로 내세울 수도 있다. 한 친이계 핵심 의원은 기자에게 “이미 몇 달 전부터 수도권의 친이계 의원들 사이에서는 ‘안 되면 이회창 대표라도 손을 잡아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공감대가 있었다. 이 대표로서도 대전 충남만 딱 쥐고 버티면서 기회를 엿보는 것 아니겠느냐. 박 전 대표가 저렇게 앙칼지고 못되게 구는데 대통령이 되겠느냐”라고 말했다.
친박계의 마음이 이미 한나라당을 떠났다는 것은 이성헌 의원이 전대 선거 과정에서 ‘아군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사건’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그는 전대 전에 “국무총리실 간부가 ‘영포목우회’(영포회) 관련 내용을 야당 측에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그 뒤에 정두언 의원이 있다는 주장도 했다. 친이계 한 한 의원은 “아무리 그래도 적군을 도와주고 아군에게 총을 겨누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이미 금도를 넘어선 친이-친박 간의 관계 복원은 영원히 물 건너갔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의 최측근인 이 의원의 위상을 볼 때 그의 폭로는 이미 ‘보스’와 사전조율을 끝낸 초강수였다는 게 중론이다. 박 전 대표가 더 이상 친이와의 관계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되는 대목이다.
박 전 대표가 탈당 공간을 자신이 직접 만들 가능성도 있다. 이는 현재 야권 일각에서 나오는 ‘빅 텐트론’과 맥이 닿아 있다. 빅텐트론은 야권의 연합정치 모델의 하나로 제시되는 방법론이다. 참여연대 김기식 정책위원장은 “지금처럼 나뉘어 있는 야당들이 ‘복지 동맹’의 기치 아래 큰 덩어리로 한 지붕 아래 뭉치고 그 틀 안에서 서로 다른 이념의 스펙트럼을 갖고 경쟁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박 전 대표도 차기 대선의 화두를 복지국가로 잡고 있다. 현재로선 진보진영과 박 전 대표가 복지를 매개로 ‘합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하지만 박 전 대표가 신당을 창당해 야당이 되고, 야당과의 공조를 통해 ‘반 MB 전선’으로 한 목소리를 내는 시나리오는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박 전 대표가 친이계를 압박하는 견제 카드로써 더 유용한 가치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 위원장도 박 전 대표와의 ‘연대’에 대해 가능성의 일단을 열어놓았다. 그는 이에 대해 “내 아버지의 꿈은 최종적으로 복지국가였다거나, 꾸준히 보건복지위원회에서 활동하는 걸 보면 다음 대선에서 복지문제를 자기 어젠다로 가져가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시대흐름을 잘 읽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다음 대선에서 복지국가 논쟁은 불가피할 것으로 본다”라고 밝혔다.
물론 ‘이번 한나라당 전당대회로 박 전 대표의 탈당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는 분석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히려 박 전 대표의 자신감이 드러났다고 해석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여의도의 한 정치 컨설턴트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로서는 굳이 지도부를 점령하지 않아도 꾸준히 민심만 관리한다면 대선 후보 경선 승리를 자신할 수 있다. 당 지도부 관여는 최대한 자제해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과의 연동을 막는 동시에 자신은 철저하게 바닥 민심만 파고들겠다는 계산이다. 대선 후보 경선은 어차피 전당대회와는 달리 당심 대 민심이 50 대 50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주류가 대의원을 장악한다고 해도 민심에서 확실하게 우위를 보이면 승산이 있다. 이 대통령의 힘이 최대한 빠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나서는 것이다. 이럴 경우 굳이 지도부에 친박계 의원들을 입성시켜 책임을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는 지난 17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7·28 재보선 전후에 만나 국정운영 방안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고 밝혀 그 배경이 주목된다. 현재로서는 두 사람의 회동이 성사된다고 해서 친이-친박 간 극적인 화해 모드가 조성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안 대표가 ‘박근혜 총리론’에 대해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고 밝혀 대타협의 가능성에 대해 일단 선을 긋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당의 한 관계자는 “친박 사정도 잘 아는 정진석 정무수석이 새로 부임했기 때문에 작품을 하나 만들려고 하는 것 아닌지 생각된다. 개각 전 친박 인사들의 입각 등을 건의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정도의 제스처가 있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양측이 서로 주고받을 게 많지 않아 그동안의 앙금이 완전히 치유되는 화해의 무대를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친박 진영에서도 “진정성만 확인된다면 우리는 언제나 협조할 준비가 돼 있지만, 구두선에 그치는 화해 조성은 의미가 없다”며 원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회동은 그동안 두 사람이 굵직한 정치현안을 전후해 만남을 가진 정도의 상징적인 의미 외에 실질적인 화해 방안을 이끌어내기는 힘들 것이란 전망이 현재로선 우세하다.
박근혜 전 대표는 이번 전당대회에서는 끝까지 관여를 하지 않고 철저하게 방관했다. 주변에서 “차기 총선 공천권은 다 날아갔다. 대선 후보 경선도 친이가 조직적으로 움직일 경우 장담할 수 없다”라며 ‘당권 진입’을 재촉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박 전 대표의 복심이 깔려 있다. 지나친 자신감이라고 보기에는 그의 지지율 패턴이 그리 건강하지 못하다. 결국 그는 친이계의 ‘박근혜 죽이기’ 2차전에 대비해 탈당 카드로 생존 전략을 모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당 복귀 여부는 박 전 대표의 탈당 카드를 미리 점쳐보는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