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금감원 그때 왜 뒷짐졌나
▲ ‘박연차 게이트’ 당시 일단락 됐던 라응찬 회장 실명제 위반 수사가 재점화 되고 있다. 사진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
신한금융지주도 직격탄을 맞았다. 실질적 오너인 라응찬 회장이 ‘박연차 게이트’ 수사 당시 금융실명제를 위반한 사실에 대해 금융 당국이 재조사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의 조사가 정상적으로 이뤄진다면 그 후폭풍은 만만치 않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판도라의 상자’로 여겨져 왔던 ‘박연차 게이트’의 은밀한 속살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이 이번 재조사를 숨죽이고 지켜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한금융지주 라 회장의 금융실명제 위반 논란을 둘러싼 후폭풍을 추적해봤다.
영포게이트의 파편은 공교롭게도 두 개의 대형 금융기관으로 튀었다. 하나는 KB금융지주 회장 인선 과정에 정권 실세들이 개입했다는 의혹이다. 의혹이 제기된 것은 영포회에서 불거진 사조직 논란이 선진국민연대로 튀었기 때문이다. 회장 인선 과정에 개입했다는 정인철 청와대 전 기획관리비서관이 이 조직 출신이다.
다른 하나는 신한금융지주 라응찬 회장의 금융실명제 위반 의혹이다. 금융실명제 위반 논란이 처음 불거진 것은 지난해 검찰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 때다. 수사진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광범위한 계좌 추적 과정에서 라 회장이 박 전 회장에게 50억 원을 전달한 사실을 찾아냈다. 라 회장이 건넨 50억 원은 본인 계좌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계좌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라 회장은 “골프장 투자를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고, 검찰은 “이 돈은 개인 자금이고 범죄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내사종결했다.
그러나 금융권에서는 라 회장이 차명계좌를 통해 개인 돈을 관리했다는 금융실명제법 위반 논란이 불거졌다. 현행 금융실명제법에서 금융회사 임직원이 차명거래를 하게 될 경우 이는 형사 처벌 대상이 된다. 일반인이 차명거래를 한 경우엔 불법자금이 아닌 이상, 차명계좌에서 나온 수익에 대해 세금만 납부하면 다른 책임은 지지 않는다.
‘박연차 게이트’ 사건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 유력인사들이 연루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검찰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사활이 걸린 수사였다. 우스갯소리로 노 전 대통령의 경우 사돈의 팔촌 계좌까지 파헤쳤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 |
금융실명제 관리 감독권이 있는 금융감독원의 대응은 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금융회사 수장의 자격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사안임에도 금감원은 조사에 수동적인 입장을 보였다. 금감원은 ‘라 회장의 차명계좌는 금융실명제 시행 이전부터 있던 것’이라는 신한금융지주 측의 해명을 그대로 수용했다.
지난 3월 라 회장이 네 번째로 연임을 할 당시에도 금감원은 이 문제에 대해서 ‘모르쇠’로 일관했다. 지난달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은 국회 정무위에서 “실명제 조사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정보가 있어야 한다”며 사실상 조사 불가 입장까지 밝혔다.
이처럼 검찰과 금융감독원이 사실상 문제를 덮어 버려 영원히 묻힐 것만 같았던 이 문제는 ‘영포게이트’라는 유탄을 맞고 다시 수면 위로 재부상하고 있다.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지난 9일 라 회장이 금융실명제법 위반 의혹을 받고 있음에도 관계 당국이 사실상 눈감아 준 이유는 ‘영포라인’ 소속 정권 실세의 외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해 논란을 재점화시켰다.
궁지에 몰린 금감원은 대책 마련에 고심한 끝에 지난 12일 라 회장의 금융실명제법 위반 여부를 가리는 검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금감원은 그동안 검찰에 자료를 요구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검찰이 자체적으로 검토한 사안에 대해 금감원이 자료를 요청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또 태도를 바꿔 조사에 나서게 된 이유는 “언론에서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결국 최초 문제가 불거질 때 먼저 검찰에 자료를 요청해 검사에 나설 수 있었는데도 이를 무시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민주당 관계자에 따르면 금감원 김종창 원장은 지난 12일 민주당 비공개 원내대책회의 당시 박 원내대표에게 직접 전화해 라 회장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금감원의 조사는 더 큰 의혹에 대한 꼬리 자르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라 회장의 실명제 위반 사실보다도 이미 의혹이 제기됐을 때 검찰과 금감원 모두 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는지다.
통상적으로 이런 의혹이 발생하면 검찰이 금감원에 통보를 하든가 금감원이 검찰에 자료를 요청한다. 정부 영향력이 큰 두 기관이 마치 입을 맞춘 듯이 조사에 나서지 않은 배후에는 바로 ‘영포라인’ 실세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부추기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실세인 누군가가 ‘박연차 게이트’ 수사에도 외압을 행사한 게 아니냐는 의혹 또한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일각에선 ‘영포라인’의 실세가 거론되기 전에 금감원이 적당한 선에서 라 회장에 대한 조사를 시작해 사태가 더 이상 확전되는 것을 막으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는 형국이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