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벌판이던 잠실 백화점 자리로 지목
▲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
최근 임종원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가 펴낸 <롯데와 신격호, 도전하는 열정에는 국경이 없다>(청림출판)에서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장녀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이 한 고백이다. 신영자 사장과 이철우 사장, 이인원 사장 등 롯데 임직원 30명의 인터뷰를 통해 엮은 이 책 내용 중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일화 몇 토막을 소개한다.
◇딸 집 보일러를 직접 고치다=수십 년 전 신영자 사장 집의 지하실 보일러가 고장이 났다. 밤늦은 시간이어서 애프터서비스 직원도 부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신영자 사장 집에 머물고 있던 신격호 회장은 직접 손전등을 챙겨 들고 지하에 있는 보일러실로 향했다. 보일러 전문가가 아니니 당연히 원인을 찾기 힘들었다. 식구들은 그냥 두고 우선 전기난로 등으로 대처하자고 했다. 하지만 신격호 회장은 30~40분간 보일러 구석구석을 살펴 끝내 그 원인을 밝혀냈고, 덕분에 그 밤을 춥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가끔 신격호 회장은 이 일화를 임원들에게 들려주고는 하는데, 기업 경영에서도 문제가 있으면 왜 문제가 생겼는지 끝까지 파고들어 최초의 원인을 찾아야 결국 문제점이 해결된다고 강조한다. 문제를 간결하게 파악해 근본적인 원인을 발견하고, 그 뿌리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신격호 회장의 기업 경영 방식인 것이다.
◇위험 무릅쓰고 화재 현장으로=과거 백화점 폐기물 적치장에서 화재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각 층에 있는 폐기물 수거함에 폐기물을 버리면 지하2층으로 떨어지는 구조였다. 이 폐기물 적치장에서 연기가 나 매장으로 들어온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상무이사를 맡고 있던 이인원 사장이 화재 발생 현장으로 급히 내려갔다.
지하 폐기물 적치장은 화재와 누전 위험으로 인해 전기까지 나간 상황이었다.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던 랜턴 불빛이 보였다. 혹시라도 위에서 쓰레기를 버리기라도 한다면 자칫 다칠 수도 있었다.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랜턴을 들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신격호 회장이었다.
바닥은 불을 끄기 위해 뿌려진 물로 완전히 물바다였다. 구두가 젖어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격호 회장은 불이 난 쪽의 위치를 확인하고, 문제점과 앞으로 개선할 점을 짚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불나는 것은 상관없다. 불이 나면 사람 생명이 다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상권은 만들 수도 있는 거야!”=잠실점이 처음 문을 열기 전, 그곳은 황량한 모래벌판이었다. 지금의 석촌호수는 그냥 물 웅덩이였고, 비가 오면 한강이 범람해서 물이 차는 유수지였다. 근처에는 봉은사밖에 없었고, 대부분 참외밭이었던 곳이다.
그런 곳에 대규모 백화점과 테마파크를 만든다고 하니 당시 직원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 매장을 어떻게 채우고 사람들을 어떻게 불러 모을 것인지부터가 문제였다. 당시 경영진이 명동은 상권이 좋아서 잘 되지만 여기는 배후 상권이 전혀 없어 장사가 안 될까 걱정이 된다고 했더니 신격호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상권은 만들 수도 있는 거야!”
경영학을 공부한 이철우 롯데쇼핑 사장도 그때까지 ‘상권을 만든다’는 말은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신 회장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사업 확장 땐 확실한 투자=신격호 회장이 사업을 확장할 때 투자하는 것을 보면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예전에 미도파백화점을 인수할 때에는 현대보다 300억~400억 원만 더 주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격호 회장은 “800억 원 더 써내”라고 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무리 말려도 신 회장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미도파 자리에는 현재 영플라자가 들어섰는데 그 위치는 노른자위다. 이 외에도 사업을 하면서 신 회장이 베팅하는 걸 보면 겁이 날 정도다. 신 회장은 늘 “앞으로 사업 잘하면 되는 거 아이가?”라고 말했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
농심이 롯데라면 만들 뻔했다고?
지난 1월 말 롯데마트가 자체브랜드(PB·Private Brand) ‘롯데라면’을 출시하면서 롯데가와 농심가는 ‘형제간 라면전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라면시장 부동의 1위인 농심의 신춘호 회장이 신격호 롯데 회장의 친동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생 신춘호 회장이 1970년대 말 라면사업을 할 때 신격호 회장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결국 농심을 차리게 돼 지금까지도 두 형제는 서로 소원한 관계라고 알려져 있다.
화제가 됐던 롯데라면은 현재 한국야쿠르트에서 만들고 있다. 그런데 롯데라면이 농심에서 만들어질 뻔했다는 얘기가 나와 눈길을 끈다. <롯데와 신격호…>는 “롯데는 프리미엄 라면 PB 개발에 가장 적합한 제조업체는 과거 롯데라면을 만들었던 농심이라고 판단해 농심에 롯데라면 PB 제조 의뢰를 했다”고 밝혔다. 롯데라면은 가쓰오부시 육수를 기반으로 한 시원하고 깔끔한 맛으로, 쇠고기 육수에 기반한 매운맛 라면인 농심의 ‘신라면’과 차별화된 데다 판매채널도 달라 롯데와 농심의 윈윈전략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판단에서다. 만약 이 프로젝트가 성사됐다면 그간 좋지 않다고 알려진 형제간의 우애를 과시할 수도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롯데와 신격호…>에 따르면 제조 의뢰 초기 실무자 차원에서는 긍정적인 검토 의견이 있었으나 6개월간의 긴 시간이 흐른 뒤 끝내 만들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6개월간 롯데가 상품을 출시하지 못해 발생한 기회매출손실이 수십억 원에 이르지만 신격호 회장은 그 일을 문제 삼지 않고 한국야쿠르트에 제조를 맡겼다는 것. 이에 대해 농심 측의 얘기는 사뭇 달랐다. 농심 관계자는 “롯데 측에서 제조의뢰를 했던 것으로 알지만 원칙적으로 농심은 PB 제품을 제조하지 않는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