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적 소재지만 뻔한 로맨스 화법에 얽매인 통속적 결말 아쉬워
국내에선 2007년 방송인 허수경이 정자를 기증받아 임신한 사실이 알려지며 ‘자발적 비혼모’가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런데 이보다 빠른 2000년에 이미 자발적 비혼모를 다룬 한국 영화가 개봉해 화제가 됐었다. 이혜영 유태웅이 주연을 맡고 한덕전 감독이 연출한 영화 ‘이프(if)‘다.
방송인 사유리는 11월 16일 자신의 SNS를 통해 “4일 한 아들의 엄마가 됐다”며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위주로 살아왔던 제가 앞으론 아들 위해 살겠다”며 출산 소식을 알렸다. 사진=사유리 인스타그램
1990년대 한국 영화의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여성 캐릭터에 있다. ‘결혼 이야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처녀들의 저녁식사’ 등이 대표적이다. 당당하고 전문적인 직장 여성, 개방적인 성담론 등이 당시 한국 사회는 물론이고 세계적인 흐름이던 ‘3세대 페미니즘 물결’과 함께 한국 영화에 녹아들었다. 물론 홀로 서고 싶은 마음과 남자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마음의 이중성 등 지금 기준에서 보면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캐릭터들도 많지만 당시에는 상당한 변화였다.
2000년 6월에 개봉한 영화 ‘이프’는 제목부터 페미니즘을 표방하고 있다. 1997년 문화상품과 문화현상에 대해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서 비평하고 분석하겠다는 취지로 창간한 계간지 ‘페미니스트저널 이프(if)’와 같다. 여기서 이프(if)는 무한대의 가능성을 지닌 ‘부정형 페미니즘’(infinite feminism)이라는 뜻이다.
특히 소재가 파격적이다. 영화가 개봉하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자발적 비혼모’를 다루고 있다. 이를 위해 영화는 여주인공의 캐릭터 구축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여주인공 ‘하영’(이혜영 분)은 비뇨기과 여의사로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고 패셔너블하다. 기분과 장소에 따라 구두를 바꿔 신을 만큼 감각적이기도 하다. 1990년대 한국 영화에 자주 등장한 당당한 커리어우먼의 모습이다.
다만 성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다. 프리섹스가 여성의 독립이라고 바라보는 시선을 하영은 남성우월주의로 받아들이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또한 섹스를 단순한 즐거움으로 여기는 남자의 사고방식에도 불만이 많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굴레를 거부한다. 하영은 처녀성을 간직한 채 정자은행에서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정자를 선택해 인공수정하는 방법으로 임신에 성공한다. 말 그대로 자발적 비혼모,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더욱 더 진보적인 방식의 임신이다.
문제는 ‘비혼모’라는 소재로 로맨스 영화를 만들려고 한 데서 오는 근본적인 한계다. 남자 주인공은 바람둥이 잡지사 기자 ‘선우’(유태웅 분)다. 당연히 하영 기준에서 선우의 모습은 속물이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진지하게 다가오는 선우의 모습에 하영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상반된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가진 남녀가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은 로맨스 영화의 가장 빤한 화법이다. 영화 ‘이프’ 역시 그 화법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2000년 개봉 영화 ‘이프’는 요즘 시점에서 봐도 파격적 소재인 비혼모를 다뤘지만 결론은 그보다 20년 전인 1980년의 통속적인 수준에 머물러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사진=영화 ‘이프’ 홍보 스틸 컷
‘비혼모’는 ‘결혼은 하지 않고 아이만 낳아 기르는 여자’를 의미한다. 사유리는 독신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아기를 낳길 원했지만 출산을 위해 급하게 결혼할 사람을 찾거나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하기는 싫어 고심 끝에 결혼하지 않고 엄마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사유리는 향후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 영화 ‘이프’의 하영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거부하는 독신주의자였던 터라 임신 상황에서 만난 선우라는 존재로 더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결국 이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커플이 된다. 여기까지는 로맨스 영화의 한계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이프’는 너무나 통속적인 결론으로 치달으며 영화의 본질까지 훼손하고 만다.
상황은 하영의 임신 소식에 갈등하던 선우가 과거 자신의 정자를 정자은행에 맡긴 일을 떠올리며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이를 계기로 선우는 조금씩 하영의 자발적 임신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하영은 출산을 한다. 여기까지도 괜찮았지만 말도 안 되는 반전이 일어난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반전 내용까지는 밝히지 않겠지만 이로 인해 영화는 매우 통속적인 해피엔딩이 된다. 2000년 개봉 영화 ‘이프’는 요즘 기준에서 봐도 파격적 소재인 비혼모를 다뤘지만 결론은 그보다 20년 전인 1980년의 통속적인 수준에 머물러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조재진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