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는 민정팀보다 ‘그들’을 신뢰
▲ 지난 9일 공직윤리지원관실 압수수색 모습과 24일 구속된 이인규 전 지원관. |
그런데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지나친 비선라인 의존이 현재의 이인규 사건을 잉태한 것”이라는 지적을 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2008년 촛불정국을 겪고 나면서 정보의 장악도 절실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일종의 대통령 정보 사조직 격인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었다. 이들이 강한 충성심으로 ‘윗선’의 정보 요구에 충실히 따랐다는 점에서 그 몸통은 바로 ‘청와대’라는 시각도 불거지고 있다. 이인규 사건의 몸통은 과연 누구인지, 그 배후를 추적해봤다.
역대 대통령들은 하루에도 수십 건씩 올라오는 각종 보고서를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정파에 따라 다르게 올라오는 정보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정보의 크로스체크였다. 그럼에도 최종 판단을 할 때는 대통령에게 가장 로열티가 높은 ‘순수한’ 라인의 보고에 의존했다. 이는 곧 정보기관들의 정보력 경쟁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중앙정보부라는 공식 정보라인을 두고 있었지만, 경호실을 비롯해 비서실장, 보안사령부, 하다못해 청와대 기자들에게까지도 정보를 보고 받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적 채널은 차남 김현철 씨가 운영했던 비밀팀이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엔 옷로비 사건으로 실체가 드러난 이른바 사직동팀이 ‘대통령 하명팀’ 역할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정원 등의 공식기관을 통해 정보를 보고받고 사적인 라인은 거의 가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희정 현 충남도지사 등의 386 최측근들을 남북대화 비선에 이용하고 정보도 보고받는 등 비선은 여전히 정권들의 유용한 통치수단이었다.
이명박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게 이번 이인규 사건으로 증명되고 있다. 원래 이 대통령은 호기심이 많고 다방면에 지식이 많아 웬만한 정보기관의 정보에 대해서는 시큰둥했다는 게 캠프 출신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오히려 이 대통령은 사적 라인을 통한 ‘날 정보’를 선호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이 대통령의 정보에 대한 ‘특이한’ 기호가 오늘의 이인규 사건을 잉태한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기자는 이인규 전 지원관을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관가의 정통한 소식통 A 씨를 통해 총리실이 무리하게 민간인 사찰까지 결행하게 된 배경의 단초를 찾을 수 있었다. 먼저 이명박 대통령의 정보 취향을 들 수 있다. 이 전 지원관은 그가 조직을 맡은 2008년 이래로 관가에서는 ‘저승사자’로 군림했다. 국회 청문회 때도 ‘건방진’ 답변 태도로 여야 의원들의 질타를 받았지만 고압적인 자세를 숙이지 않았다. 이를 두고 ‘누가 뭐래도 내가 이 대통령의 가장 확실한 정보원’이라는 그의 남다른 자존심이 은연중에 투영됐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 이명박 대통령은 공식라인보다 실세들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비선라인의 정보 보고를 더 신뢰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
이런 점에서 정보를 왜곡시키지 않고 정확한 팩트만 전해줄 충실한 전달자가 필요했는데, 그 역할에 딱 맞았던 사람이 바로 이인규 전 지원관이었다. A 씨에 따르면 정보기관 출신이 아닌 공무원 중에서 이 전 지원관만 한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고 한다. 기억력이 비상하고 무엇보다 정권에 대한 로열티가 남달라 웬만한 로비에는 끄떡도 하지 않고 자부심이 대단해 이 대통령이 그를 굉장히 신임했다고 한다.
이 전 지원관은 경북 영덕 출신으로 노동부에서 국장급(3급)으로 지내다가 승진 케이스로 공직윤리지원관실 팀장(2급)으로 입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지난 2008년 8월경 부임해 2010년 8월이 되면 만 2년이 되기 때문에 차관급 인사 시점에 맞춰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노동부 1급으로 복귀하기를 강력하게 희망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 그는 주변 지인들을 통해 자신의 후임을 찾고 있었다고 한다. 그 기준은 “국정원 검찰 경찰 출신이 아니고 일반 행시 출신 중에서 머리가 잘 돌아가고, 사정 감각이 있어야 하고, 동향(포항)에 로열티도 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반 공무원 중에 일단 사정 감각을 가진 사람을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였던 것. 그는 국민권익위원회에까지 대상자를 물색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이영호 전 비서관도 자신의 ‘친정’인 노동부 출신 가운데 이인규 전 지원관 후임을 물색하려고 여러 차례 알아봤지만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 전 지원관이 후임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민정 라인과 갈등도 빚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청와대 민정 라인은 한상률 전 청장 골프로비 사건 등 일련의 ‘사건’에서 이인규 전 지원관 팀에 밀리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이 전 지원관의 후임에는 무조건 민정 라인 인맥을 포진시키려 애를 썼는데, 이영호 전 비서관 역시 자기 사람을 계속 후임에 앉히려 노력했기 때문에 양측이 치열한 신경전을 펼쳤다는 것이다.
당시 민정라인은 감사원 출신의 C 국장을 이 전 지원관 후임에 앉히려고 총력을 기울였지만, 이영호 전 비서관은 물론 박영준 국무차장까지 반대를 하고 나서는 바람에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정보계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인규 사건이 터지기 전 여권 실세들 간에 정보 주도권 경쟁이 치열했다. 권재진 민정수석과 이영호 비서관, 박영준 국무차장 모두 이명박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었던 상황이라, 정보력의 핵심이었던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후임 인사는 실세들의 명암이 엇갈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던 셈”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윤리지원관실은 이 대통령과 바로 직통 채널을 가동했을까. 이와 관련해 총리실 박영준 국무차장과 청와대 이영호 전 비서관이 1차 스크린을 한 다음 이 대통령에게 직보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먼저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지난 2008년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권력 실세’가 직접 인원 선발 및 조직 구성에 관여했다는 말이 무성했는데 앞서의 A 씨가 그 일부를 확인해줬다. A 씨는 이에 대해 “이인규 전 지원관은 ‘특별팀’ 신설 소식을 듣고 자신의 인맥을 모집하려고 수소문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SD라인(그의 표현)에서 그들 인맥으로 상당수를 채운 인사리스트를 줘 할 말을 잃었다고 주변에 말한 것으로 안다. 그래서 이 전 지원관은 그와 친분이 있는 일부 ‘후배’들에게 약속한 자리를 줄 수 없었다고 했다. 인사에 관한 한 그도 외부 입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SD’는 이상득 의원을 지칭하는 말인데 여기에서 박영준 국무차장이 ‘대리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먼저 제기된다. 이렇게 박 차장은 윤리지원관실 신설에 깊숙이 관여했고, 그 뒤 이 전 지원관의 정보 보고는 주로 이영호 전 비서관을 통해 청와대로 들어갔거나, 이인규 전 지원관이 대통령에게 직보를 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앞서의 A 씨는 이에 대해 “평소 이 전 지원관은 주변에 ‘내가 청와대 민정보다 훨씬 더 막강하다. 왜냐하면 그들보다 더 보람된 일을 하고 소명의식도 투철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그는 자신의 정보를 총리에게도 보고하지 않고 박영준 차장과 업무 협의를 한 뒤 곧바로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이영호 전 비서관이 청와대 파이프라인 역할을 했고, 자신의 주 업무였던 고용노사는 형식뿐이었다”라고 말했다.
‘이인규 사건’은 이명박 대통령이 비선라인에 지나치게 의지하면서 발생한, 왜곡된 정보채널의 후폭풍이다. 이 과정에서 이영호 전 비서관 등의 정권 실세들이 수요자의 요구를 너무 오버해서 따르는 바람에 민간인 사찰로까지 이어지는 비정상적인 정보활동까지 초래했다. 현재 검찰이 이인규 사건의 몸통을 추적하고 있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찾아내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법적인 경계를 떠나 이명박 대통령이 왜곡된 정보채널의 정점에 서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현 정권으로서는 무거운 짐을 짊어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