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떨친 엘리트 제 혀에 넘어졌다
▲ 불우한 가정환경과 극복. 강용석 의원은 정치인으로 성공할 수 있는 최고의 ‘스펙’을 가졌지만 ‘설화’로 인해 정치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서울법대 3학년 때 이미 사법시험에 합격한 강 의원은 아시아인 최초로 하버드 학생 공동대표를 맡는 기염을 토하며 신엘리트로 부상했다. 그리고 지적재산권과 IT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떨치던 그는 한 차례의 고배를 맛본 뒤 지역구민들의 신임을 받아 정치계에 발을 디뎠다. 전통적으로 야당 성향이 강한 마포에서 강 의원이 당선된 것은 센세이션한 일이었다.
182㎝의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하고 준수한 외모, 세련된 스타일과 말솜씨를 지닌 변호사 출신의 젊은 정치인은 그야말로 매력만점이었다. 강 의원은 국회의원들의 권위주의에서 탈피, 지역주민들과 접촉하기 위해 동네 축구부와 야구부에까지 가입했다.
하지만 최고의 ‘스펙’을 갖고 39세의 나이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강 의원의 인생 스토리는 전혀 예상 밖이다.
강의원은 소위 말하는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그의 성장 환경은 거의 최악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귀공자 같은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강 의원은 마포구 대흥동의 빈민가에서 성장했다. 그는 집안에 화장실이 없어 주민들과 같이 공동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도시빈민의 아들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청소년 강용석을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아버지의 부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강 의원의 아버지는 교도소를 수시로 들락거렸으며 무책임하고 생활력이 없었다. 결국 강 의원은 아버지 대신 홀어머니 밑에서 사실상 성장했다.
강 의원을 엘리트로 키운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강 의원의 모친은 찢어지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강 의원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맹모삼천지교라 했던가. 강 의원의 미래를 고려해 그의 모친은 경기고 인근으로 이사했고 비록 당시 추첨방식이긴 했지만 그는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생활이 윤택하지 못해서 굉장히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 당시 공부 안하는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시험 끝나면 술마시러 다녔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자란 강 의원은 고교부터 본격적으로 ‘인생역전’을 위한 ‘승부’에 들어간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열악한 성장환경, 빛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은 오직 ‘출세’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강 의원의 뇌리에 뿌리깊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대한민국 사회에서 최고의 출세는 사시에 합격해 임관하는 것이었다고 판단한 그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서울법대에 진학한다.
고교 3학년 때 MBC <장학퀴즈>에 나가 장원을 해 받은 상금으로 서울법대에 등록한 그는 대학 3학년인 1991년 사시에 합격하는 기염을 토하며 예비 법조인의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시련은 계속됐다. 공군 법무관을 예편한 뒤 판사가 되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수한 연수원 성적에도 불구하고 당시 목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아버지가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강 의원은 굴하지 않았다.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로스쿨 과정을 마친 강 의원은 변호사로서 날개를 펴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눈물 젖은 빵’을 먹고 자란 탓일까. 변호사 강용석은 기득권보다는 약자를 변론하고 사회정의에 관심을 갖는 인물이었다.
그는 1998년부터 약 5년 동안 참여연대에서 경제개혁센터 집행위원을 맡으면서 재벌개혁과 소액주주 보호 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강 의원은 동료 변호사들과 함께 ‘소액주주 소송 전문로펌’을 만들어 대우전자 분식회계, 세종하이테크 주가조작 관련 소송을 대리해 보상을 이끌어내기도 했으며 1999년 Y2K(밀레니엄 버그) 법적 문제를 국내에서 처음 제기한 장본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친 것은 이른바 ‘삼성 때리기’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부터였다. 강 의원은 2001년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 이건희 회장의 장남 이재용 씨가 삼성전자 상무보로 임명된 것을 신랄하게 비판해 주목을 받았다.
강 의원은 평소 “서민을 위한 변론이 가장 보람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1998년 지리산 수해로 야영객 30여명이 사망한 사건에 대해 국가배상을 이끌어 냈던 강 의원은 “신문기사를 보고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 먼저 유족들에게 연락해 변론을 맡았다”며 “유족 대부분이 서민들이라 소송비용도 내가 부담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간 강 의원의 행보를 지켜본 측근들과 네티즌들이 이번 사태에 대해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관련 일각에서는 강 의원의 문제성 발언들과 관련, 그럴듯한 해석과 함께 ‘강용석을 위한 의미 있는 변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강 의원이 불우한 성장환경에서 자란 자수성가형 인물이라는 점에 근거해볼 때 어쩔 수 없이 혹은 자신도 모르게 ‘마초(남성우월주의자) 기질’을 학습했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또 가정형편으로 인한 숱한 한계에 부딪히면서 그는 끊임없는 좌절을 맛봐야 했고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습성이 생겼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사회학자들은 상당수의 자수성가형 인물들이 성공·출세 강박관념에 시달린다고 보고하고 있다. 반면 공인으로서의 인식이나 자세, 상식을 갖추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성장과정에서 억눌렸던 욕망이 성공가도에 들어선 이후 주체할 수 없이 분출되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는 욕구가 앞서면서 스스로의 함정에 빠졌다는 말이다.
일부는 명석한 두뇌와 피끓는 노력으로 성공가도에 진입한 강 의원이 사회 리더로서의 자만심에 빠졌고 순간적으로 절제력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강 의원은 이전에도 자신만의 ‘논리’와 ‘철학’에 빠진 나머지 물의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분출하곤 했었다. 훗날 대권까지 바라보는 정치인을 목표로 길게 내다봤으면 그는 ‘자제’했어야 했다.
강 의원의 내재된 콤플렉스에 더해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정상적인 남성의 롤모델을 전수받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여성의 외모·신체에 대한 언급이나 민감한 주제들, 술자리에서 남자들끼리 오갈 수 있는 질펀하고 끈적거리는 ‘Y담’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발설한 것도 이 때문으로 악의적인 의도는 없었을 거라는 분석이다. 강 의원의 발언은 3인 이상이 모인 자리에서 하기에는 분명 부적절했고 잘못된 것이지만 말 그대로 입방정이라는 얘기다.
강 의원의 블로그를 보면 그는 상당히 유머러스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일상은 물론 상황별로 느끼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시키는 ‘입담’과 ‘필담’을 자랑한다. “원희룡 의원의 헤어스타일은 늘 얘깃거립니다. 띄우면 이마가 너무 넓어 보이고, 붙이자니 인상이 너무 날카로워 보이고” “50, 60대 할아버지 의원님들한테 꼬깔모자 쓰라고 하면 짜증내겠죠?” “목진휴 교수님은 누구 닮았냐면요. KFC 앞에 서 있는 머리 허연 노인네 있잖아요. 딱 그 사람이에요. 이거 설마 목 교수님이 보진 않겠죠? ㅎ”
학벌과 간판 같은 스펙에 열광하는 한국사회에서 강용석이라는 인물은 정치인으로서 무궁무진한 잠재력과 폭발력을 지닌 인물로 승승장구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특히 불우한 가정환경과 갖가지 시련들을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선 그의 인생스토리는 태생부터 다른 여타 엘리트들에게 반감을 가진 서민들에게도 충분히 ‘먹힐 수’ 있었고 그것은 그가 가진 최고의 스펙이었다.
하지만 “유신독재, 민주화운동 탄압, 정경유착, 부패와 연루된 ‘음습한 극우성향’ 인물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던 초선의원은 ‘가벼운 혀놀림’으로 인해 정치생명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됐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
강용석 정치인생 어떻게 되나
당 재보선 염두 ‘초스피드 제명’
그간 자진탈당 및 의원직 사퇴를 요구해왔던 한나라당이 결국 강 의원을 제명했다. 한나라당 윤리위원회는 7월 20일 강 의원에 대해 윤리위원 11명 중 최병국 위원장 등 위임자를 포함,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징계의 최고단계인 제명’을 의결했다.
그렇다면 강 의원의 정치생명은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하지만 제명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한나라당 당헌·당규에 따르면 소속의원의 제명은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현재 167석인 한나라당에서 최소 111명이 찬성해야만 제명되는 셈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강 의원의 제명을 최종 결정하게 될 의원총회를 당장 소집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현재 외유 중인 의원들이 많아 강 의원의 제명건으로 의총 소집이 불확실하다는 얘기가 들린다.
당규의 재심조항을 봐도 강 의원의 빠른 제명은 어려워 보인다. 당규 25조는 ‘윤리위 결정에 불복해 재심을 청구할 경우 윤리위는 30일 안에 다시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강 의원이 재심을 청구한 순간부터 한 달의 여유가 생기기 때문에 제명에 대한 최종결정은 8월 말 이후에나 가능할 가능성도 있다.
또 강 의원이 최초로 보도한 언론사 기자를 고소하면서까지 문제성 발언들에 대해 극구 부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료의원들이 제명의사를 밝힐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일각에서는 한나라당 윤리위의 제명조치는 7·28 재보선을 의식한 것으로 그 시기가 지나면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이번 윤리위의 조치에 대해 당내에서는 절차를 무시한 ‘성급한 조치’였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한편 의원직 제명의 경우는 헌법 제64조 3항에 따르면 국회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가능하다. 조항에 따라 제명된 역대 국회의원은 단 두 명이다.
김을동 미래희망연대 의원의 아버지인 김두한 전 국회의원(제6대)이 ‘본회의장 분뇨 투척사건’으로 제명당한 바 있고, 1979년 10월 4일 유신정권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도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YS는 그해 9월16일자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통해 “미국은 우리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나라”라고 밝혔다. 이에 여당은 ‘국회의원으로서 본분을 일탈하여 반국가적인 언동을 함으로써 국회의 위신과 국회의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며 제명했다.
당 재보선 염두 ‘초스피드 제명’
그간 자진탈당 및 의원직 사퇴를 요구해왔던 한나라당이 결국 강 의원을 제명했다. 한나라당 윤리위원회는 7월 20일 강 의원에 대해 윤리위원 11명 중 최병국 위원장 등 위임자를 포함,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징계의 최고단계인 제명’을 의결했다.
그렇다면 강 의원의 정치생명은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하지만 제명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한나라당 당헌·당규에 따르면 소속의원의 제명은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현재 167석인 한나라당에서 최소 111명이 찬성해야만 제명되는 셈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강 의원의 제명을 최종 결정하게 될 의원총회를 당장 소집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현재 외유 중인 의원들이 많아 강 의원의 제명건으로 의총 소집이 불확실하다는 얘기가 들린다.
당규의 재심조항을 봐도 강 의원의 빠른 제명은 어려워 보인다. 당규 25조는 ‘윤리위 결정에 불복해 재심을 청구할 경우 윤리위는 30일 안에 다시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강 의원이 재심을 청구한 순간부터 한 달의 여유가 생기기 때문에 제명에 대한 최종결정은 8월 말 이후에나 가능할 가능성도 있다.
또 강 의원이 최초로 보도한 언론사 기자를 고소하면서까지 문제성 발언들에 대해 극구 부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료의원들이 제명의사를 밝힐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일각에서는 한나라당 윤리위의 제명조치는 7·28 재보선을 의식한 것으로 그 시기가 지나면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이번 윤리위의 조치에 대해 당내에서는 절차를 무시한 ‘성급한 조치’였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한편 의원직 제명의 경우는 헌법 제64조 3항에 따르면 국회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가능하다. 조항에 따라 제명된 역대 국회의원은 단 두 명이다.
김을동 미래희망연대 의원의 아버지인 김두한 전 국회의원(제6대)이 ‘본회의장 분뇨 투척사건’으로 제명당한 바 있고, 1979년 10월 4일 유신정권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도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YS는 그해 9월16일자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통해 “미국은 우리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나라”라고 밝혔다. 이에 여당은 ‘국회의원으로서 본분을 일탈하여 반국가적인 언동을 함으로써 국회의 위신과 국회의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며 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