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밍 정치’로 호남서 처음으로 이낙연 앞서…재보선 결과가 양자 희비 가를 전망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추(추미애 법무부 장관)·윤(윤석열 검찰총장) 갈등 최대 수혜자로 등극했다. 진원지는 여권 텃밭인 호남에서 시작됐다. 호남 민심의 특징이 전략적 선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재명 대안론이 금명간 이낙연 대세론을 누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지사 지지도가 튀어 오르는 사이, 뒷짐 논란에 휘말렸던 문재인 대통령과 ‘사이다 발언’이 사라진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지지도는 하락했다. 여권 권력투쟁 제2막이 시작된 셈이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11월 6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경기도 예산정책협의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미래 권력은 현재 권력의 여집합이다.” 여의도 한 전략통은 차기 대권잠룡 전망에 관해 묻자 이 같은 말을 던졌다. 민심은 현재 권력자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정치인을 미래 권력으로 세운다는 얘기다. 실제 그랬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치른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준비된 경제 대통령’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다. ‘경알못(경제를 알지 못하는)’ 비판에 시달렸던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극명히 대비됐다. 요즘 말로 흙수저인 노무현 전 대통령은 DJ에게 없는 권위주의 타파 행보로 2040세대를 열광시켰다.
문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부동산으로 뭇매를 맞았던 노 전 대통령은 ‘샐러리맨의 신화’ 이명박(MB) 전 대통령에게 정권을 넘겼다. 그러나 MB는 BBK 의혹을 비롯해 잇단 사사로운 권한 남용 논란에 휘말렸다. 그 대체재는 ‘원칙과 신뢰’ 정치인으로 통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차지했다.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했던 박 전 대통령은 세종시 원안을 고수하며 5년 2개월 만에 직접 국회 본회의장 연단에 올라 MB 정부를 성토했다. 하지만 박근혜 신화는 국정농단 게이트로 막을 내렸다. 그 자리는 문 대통령이 꿰찼다. 보수 정권 내내 권력 사유화 논란이 계속되자,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로운’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문 대통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이재명 대안론이 주목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부동산 대란에 직격탄을 맞은 문 대통령은 추·윤 갈등 국면에서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문 대통령이 12월 7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정국 혼란에 죄송하다”며 처음 사과했지만, 민심의 기차는 이미 탈선 중이다. 문 대통령은 사과한 자리에서 검찰 개혁에 관해 정면 돌파 의지를 천명, 되레 야권으로부터 ‘전쟁 개시 돌격명령’이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여권 한 관계자도 “추·윤 갈등은 진작 정리했어야 하는 문제”라고 비판했다. 여당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를 비롯해 5·18 진상규명 특별법 개정안 등을 밀어붙인 이유도 이탈한 진보층과 호남 유권자를 의식한 결과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공수처법이 처리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6분에 불과했다. 야권에선 “집토끼(지지층) 이탈에 화들짝 놀란 여당이 합의를 뒤집고 군사작전 하듯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비판했다. 여권이 타이밍 정치를 실기하면서 무리수를 뒀다는 의미다.
문 대통령의 약한 고리는 이 지사의 최대 장점으로 꼽힌다. 앞서 신천지 신도 전수조사로 코로나19와의 전쟁을 개시한 그는 이후 긴급재난지원금을 비롯해 기본소득, 기본주택, 기본대출 등의 이슈를 선점했다. 이 지사는 긴급재난지원금 전 국민 지급 등에 난색을 보인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향해선 “기재부의 나라냐”라고 비판했다. 기재부의 경제와 재정을 보는 관점에 대해선 “과거 고도성장기의 사고에 그대로 머물러 영원한 어린이 피터팬을 보는 것 같다”고 일갈했다.
이 지사가 강공 전략만 쓰는 것은 아니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진보층과 중도층 사이에서 갈지자 행보를 보이는 사이, 이 지사는 문 대통령의 비판을 삼가며 친문(친문재인) 지지층 끌어안기에 나섰다. 여의도 전략가들이 “치고 빠지는 타이밍 정치는 탁월하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법치주의를 명분 삼아 강공 전략을 펼치는 이 지사의 리더십은 문재인 정부의 여집합이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와 정청래 의원이 12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낄끼빠빠(낄 데 끼고, 빠질 때 빠지는) 전략’을 쓴 이 지사의 차기 대권 가능성은 지지도 수치로 곧장 나타났다.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이 12월 4일 공개(1∼3일 조사)한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에 따르면 이 지사(20%)는 3강을 같이 형성한 이낙연 대표(16%)·윤석열 검찰총장(13%)을 오차범위 내(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에서 앞섰다. 한 달 전 19%로 동률을 이뤘던 이 대표와의 균형추는 마침내 흔들렸다.
특히 눈여겨볼 수치는 △호남 △2050세대 △진보층이다. 호남에서 이 지사는 자신의 평균 선호도를 훌쩍 넘는 27%를 기록했다. 이 대표는 26%로 조사됐다. 1%포인트 차에 불과하지만, 호남에서 이 지사가 오차범위 내 우세를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60대 이하에서도 이 지사는 비교우위를 보였다. 20대(19세 포함) ‘13%(이재명) vs 10%(이낙연)’를 시작으로, 30대(23% vs 17%) 40대(29% vs 21%) 50대(25% vs 15%)에서 우위를 점했다.
이 대표는 60대 이상에서만 16%로, 이 지사(12%)를 앞섰다. 진보층에선 이 지사가 34%로, 26%에 그친 이 대표를 오차범위 밖에서 이겼다. 이 조사에서 문 대통령 지지도는 지난주 대비 1%포인트 하락한 39%를, 부정 평가는 같은 기간 3%포인트 상승한 53%를 각각 기록했다(한국갤럽의 자세한 조사개요와 결과는 여론조사업체 홈페이지 및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문 대통령의 지지도 39%는 문재인 정부 들어 한국갤럽이 조사한 이래 가장 낮은 수치다. 앞서 조국 사태와 부동산 대란이 한창인 지난해 10월 셋째 주와 올해 8월 둘째 주에 이어 세 번째로 최저치를 기록한 셈이다. 문 대통령 지지도가 호남과 진보층, 60대 이하 등에서 추가로 하락할 경우 이 지사가 ‘풍선 효과’를 보는 역설이 계속될 수도 있다.
문 대통령과 이 대표가 처한 환경은 최악이다. 노무현 정부를 무너뜨린 부동산 대란은 연일 동시다발적으로 확전 중이다. 검찰 개혁을 둘러싼 진보와 보수 갈등은 잦아들지 않고 있다. K방역으로 그나마 버텼던 코로나19는 12월 9일 0시 기준 확진자가 686명으로, 역대 2번째를 기록했다. 병상 부족 등이 현실화할 땐 민심이 폭발할 수도 있다. 야권 한 관계자는 “폭등하는 아파트값과 전월세난, 검찰 개혁 갈등, 코로나19 재확산 등은 집권 4년 차를 지나는 문 대통령이 넘어야 할 3가지 산”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 지사 앞에도 꽃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당장 이 대표와 호남 쟁탈전을 놓고 1차 승부를 펼쳐야 한다. 전남지사를 지낸 이 대표는 전남에서만 16∼19대까지 내리 4선을 했다. 전북의 맹주가 정세균 국무총리라면, 이 대표는 전남의 맹주 격이다. 앞서 10월 24일 5·18 민주묘역을 참배했던 이 대표는 엿새 뒤인 10월 30일에 광주에서 첫 현장 최고위원회를 개최하는 등 호남 민심에 연일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여당이 5·18 진상규명 특별법 처리에 나선 것도 이 대표의 의중이 실린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검찰 조사를 받던 최측근 인사가 사망하는 등 최대 위기를 맞은 이 대표는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 호남 유권자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할 것으로 보인다.
역대 선거 때마다 호남 유권자들이 될 사람을 밀어주는, 전략적 투표를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대표가 이 지사와의 호남 쟁탈전에서 밀릴 경우 당내 예선전에서 미끄러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민주당 한 당직자는 “호남 민심은 기승전 전략적 선택”이라며 “결단코 약자에게 동정표를 던지는 언더도그 효과는 호남에선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호남 연고가 없는 이 지사도 지역 유권자 끌어안기에 공을 들이고 있다. 11월 26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한전공대 특별법’을 지적하자, “앞에선 호남 동행, 뒤에선 발목 잡기하는 국민의 힘”이라고 비판한 게 대표적인 예다.
양자의 희비를 가를 변수는 역시 내년 4월 재보궐 선거 결과다. 악재를 떠안은 여당이 재보선마저 사수한다면, 이낙연 대세론은 기사회생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여당 참패로 끝날 땐 이재명 대안론이 대세론으로 격상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친문계도 ‘이낙연이냐, 이재명이냐’를 결정할 것으로 전망된다.
여권 한 전략통도 “이 지사의 대선행 여부를 결정지을 마지막 산은 역시 친문계의 옹립”이라며 “이재명 리스크에 대한 우려가 여전한 당 주류는 막판까지 제3의 후보론 띄우기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이 지사가 이낙연 대세론을 넘더라도 정세균 국무총리나 이광재 민주당 의원 등의 거센 도전을 받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