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창고서 잠자던 ‘김옥균 바둑판’ 찾아와
이청이 이승우의 <바둑의 역사와 문화>를 화두로 삼은 것은 책의 내용 중 특히 중국의 바둑 고전 <현현기경> 1부의 해석이다. “그동안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도 현현기경의 1부에 해당하는 서지부(序之部)는 정확한 해석본이 없었고 수법편에 해당하는 세지부(勢之部)의 367제(題)만이 현현기경의 전부인 것처럼 치부되어 왔던 것인데, 그걸 이번에 선생이 깨우쳐 주었다. 현현기경의 서문 사론 위기부 기경 10결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성과가 아닐 수 없다”는 것.
현현기경 서지부의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거니와 이승우에 대해서는 늘 한 가지, 꼭 소개하고 싶은 옛날 얘기가 있다. 그동안 이승우는 저술활동 외에도 바둑계에 끼친 공로가 많았는데, 그 중 압권은 일본기원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김옥균 바둑판’을 찾아내 국내로 가져온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1995년 초여름의 어느 날 이승우는 비슷한 연배의 일본인 10년 지기 미스구치 후지오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미스구치는 무려 38년을 일본기원 편집부에서 일하고 은퇴한 사람. 안부 편지 정도로 알고 무심코 읽어 내려가던 이승우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편지는 엄청난 얘기를 전하고 있었다. “일본기원이 소장하고 있는 바둑문화재 목록 가운데 김옥균 바둑판이라는 게 있다”는 것이었다. 이게 만일 사실이라면 이건 그야말로 한국 근대바둑사에 한 획을 그을 것이었다.
이승우는 지체 없이 도쿄로 날아가 미스구치와 함께 일본기원 도서실과 창고를 뒤졌다. 그러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 바둑판은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100여 년 전에 조선 망명객이 쓰던 바둑판이 아직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을 리가 없지. 목록에나 남아 있는 것이지. 실망하는 이승우에게 미스구치는 “한 군데 더 가볼 곳이 있다”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도쿄 중심지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인 치바였다. 조치훈 9단이 사는 동네다. 치바에는 일본기원 연수원이 있었다. 두 사람은 연수원 창고로 내려갔다. 겹겹이 쌓여 있는 바둑판들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오동나무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뚜껑을 열었다. 바둑판을 뒤집어 보았다. 절반 정도가 글씨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글의 끝에 서명 같은 것이 있었다. 서명은 ‘고균(古筠)’이었다. 고균. 김옥균의 아호. 아니나 다를까 고균 뒤에는 김옥균(金玉均) 석 자가 있었다. 이승우는 콧날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바둑판은 표준규격이었고 4치 두께의 비자나무 판이었다. ‘후쿠이 간베에’라는 이름도 있었다. 바둑판을 만든 장인의 이름이었다.
얼룩이 지고 헐었고 비틀려 있었으니 꽤 오래 된 것이었으리라. 누가 쓰던 것이었을까. 본인방을 비롯한 4대 가문 고수들 중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것은 아닐까.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바둑계가 오히려 쇠잔해지게 되는 세월 속에서 살아남았으니 비운의 바둑판일지 모른다. 비운의 바둑판이 비운의 망명객을 만난 것이었을까. 만감을 안고 돌아온 이승우는 일본기원 총무이사에게 절절한 편지를 띄웠다.
“일본기원 연수원 창고에 있는 김옥균 바둑판은 우리에게는 국보급에 해당하는 귀한 문화재다. 그 바둑판이 주인의 나라로 돌아가 대접받게 하는 것이 바둑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또한 그로 인해 한·일 두 나라는 더욱 우의가 돈독해질 것이다.”
답신이 왔다. “바둑판을 기증한 사람이 김옥균 선생 자신은 아니므로, 우선 기증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허락을 받더라도 이승우 개인 부탁으로는 곤란하고, 뭔가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달라”는 것이었다.
기증자는 이미 세상을 뜨고 없었다. 기증자의 후손들에게 허락을 받아내고 한국기원에 저간의 사정을 알렸다. 한국기원은 이사장 이름으로 바둑판 반환을 요청하는 공문을 띄웠다.
1995년 9월, 서울에서 당시 세계 바둑의 ‘어린 왕자’로 떠오르던 이창호와 일본기원에서 맹활약하던 류시훈의 특별3번기 이벤트가 있었다. 김옥균 바둑판은 그때 류시훈 일행과 함께 주인의 나라로 돌아와 한국기원 이사장실에 안치되었다. 몇 년 후 이승우는 한국기원에 들를 일이 있어 올라왔다가 이사장실에 있는 바둑판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바둑판은 유리상자 안에 있었는데, 금이 몇 개 가있었다. 비자나무 판은 습도에 아주 민감해 바둑판 위에 물이 담긴 컵 같은 것을 올려놓아 습도를 맞추어 주어야 하는 것인데, 그런 게 없었던 것. 유리상자는 보호장치가 아니었다.
이승우는 지금도 충주 모충동, 충북대학교 근처 3층 양옥의 자택 1층에 꾸민 ‘청석 바둑문화 연구실’에서 바둑을 위해 남은 열정을 쏟고 있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