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발행 디지털 화폐 내년 파일럿 테스트 계획…네이버·카카오는 관련 사업 확장, 시중은행은 협업 나서
한국은행이 내년 CBDC 파일럿 테스트를 준비하면서 관련 업계가 분주하다. 2019년 7월 미국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가 개최한 페이스북 가상화폐 ‘리브라’에 대한 청문회 모습. 사진=연합뉴스
#한국은행 CBDC 파일럿 어디까지 왔나
한국은행의 CBDC 관련 연구는 2018년 시작됐으나 발행 가능성이 커진 것은 올해부터다. 한국은행은 2018년 1월 가상통화(암호화폐)가 지급결제시스템과 금융시스템 전반에 미치는 영향과 CBDC 발행 관련 이슈를 연구하기 위해 ‘가상통화 및 CBDC 공동연구 TF’를 구성하고 첫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이후 2019년 1월 내놓은 지급결제 조사연구자료 ‘중앙은행 디지털화폐’에서는 “주요국 중앙은행과 마찬가지로 현시점에서 우리나라가 가까운 장래에 CBDC를 발행할 필요성은 크지 않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올해부터다. 세계 주요국들이 입장을 바꿔 CBDC 논의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10월 바하마와 캄보디아가 CBDC를 발행했고, 중국은 오는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기간을 목표로 CBDC 발행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은행 역시 세계적인 흐름에 따라 지난 2월 전담조직을 신설해 관련 연구를 수행하고, 지난 4월에는 CBDC 파일럿 테스트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추진 일정에 따르면 12월까지 업무프로세스 분석 및 컨설팅을 마무리하고, 내년 1월부터는 1년간 CBDC 파일럿 시스템 구축 및 테스트에 돌입할 계획이다. 다만 한국은행의 CBDC 시스템 컨설팅 사업을 위한 사업자 선정은 EY한영의 단독응찰로 두 차례(지난 9월과 10월) 유찰돼 지연됐고 현재까지도 컨설팅 단계에 머물러 있어 구체적인 유통방안이나 플랫폼 등은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내년 CBDC 파일럿 테스트를 앞두고 시스템 구축을 위한 컨설팅 단계에 있고, 구체적 방안도 구상하고 있는 것은 있다”며 “파일럿 테스트는 가상환경에서 진행하는 실험이므로 실제 환경과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어 “궁극적으로 언젠가 CBDC를 발행할 수밖에 없어 시중은행들과 협업하게 되지 않겠느냐”면서도 “(한국은행이 CBDC를) 발행한다고 말한 적은 없고, 연구차원에서 파일럿 테스트를 진행하는 것”이라고 말을 아꼈다.
#네이버‧카카오 사업 확장 가능성 커지나
각국 중앙은행의 CBDC 논의는 지난해 페이스북이 자체개발을 시도한 암호화폐 리브라(Libra) 발표에 영향을 받았다. 페이스북은 당초 리브라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글로벌 단일 디지털 통화를 계획했다. 그러나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미 의회를 비롯한 각국 금융당국의 반대로 각국의 개별 전통 통화와 연동되는 스테이블 코인(가격 변동성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된 암호화폐)으로 계획을 수정하고 코인의 명칭도 ‘디엠’으로 변경했다. 페이스북은 내년 초 디엠 출시를 추진하고 있지만 여전히 주요 7개국을 비롯한 각국 금융당국의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글로벌 기업이 움직이자 국내 ICT 대기업들도 앞다퉈 암호화폐를 발행하고 관련 사업 확장에 나서고 있다. 카카오는 블록체인 자회사 그라운드X를 통해 블록체인 플랫폼 클레이튼을 기반으로 자체 개발한 가상자산 ‘클레이’를 발행했다. 지난 6월에는 클레이를 보관·전송할 수 있는 가상자산 지갑 ‘클립’도 출시했다. 네이버 또한 자회사 라인을 통해 자체 개발 가상자산 ‘링크’를 발행하고 지난 8월 일본 암호화폐 거래소를 통해 상장했다. 라인은 해외 법인을 통해 미국 시장을 타깃으로 암호화폐 거래소 ‘비트프론트’도 운영하고 있다. 비트프론트는 지난 11월 4일 링크 이자 수익 상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이에 관련, 업계에서는 이미 블록체인 플랫폼을 구축하고 암호화폐를 발행한 카카오나 네이버가 한국은행의 CBDC 파일럿 테스트에서 유통을 담당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한국은행의 파일럿 테스트가 한국은행은 CBDC 발행과 환수를 담당하고 유통은 민간에 맡기는 민관 협업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중순에는 한국은행과 카카오 자회사 그라운드X 간 CBDC 유통부문 논의가 진행됐다는 구체적 풍문이 전해졌다. 네이버의 경우 자회사 라인의 블록체인 개발사 언체인 이홍규 대표가 대만에서 열린 블록체인 리갈 포럼에서 “라인은 이미 소매결제 서비스를 제공한 경험이 있어 완전한 CBDC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혀 주목받았다. 다만 앞서의 한국은행 관계자는 ICT 대기업과의 논의 여부에 대해 “그쪽(ICT 대기업)의 주장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한국은행이 내년 CBDC 파일럿 테스트를 운영함에 따라 블록체인 사업에 진출해있던 ICT대기업은 물론 시중은행까지 발빠른 대응에 나섰다. 사진=비트프론트 홈페이지
#시중은행들 가상자산 시장 진출 ‘짝 찾기’
당초 CBDC가 발행될 경우 은행의 자금중개기능과 신용배분 기능이 약화될 가능성이 제기됐다. 경제주체들이 예금 중 일부를 CBDC로 교환·보유하는 경우 은행의 예금이 감소하고, 이에 따라 은행의 자금조달 비용이 증가해 은행대출이 감소하게 된다는 우려다. 그러나 시중은행들은 디지털 자산을 바라보는 정부와 금융당국의 온도 변화에 발 빠르게 움직이며 디지털 자산 관련 사업 기회를 엿보고 있다. 한국은행 또한 CBDC 도입을 검토하며 시중은행이 대국민 서비스를 맡는 등 민간은행과 역할을 배분하는 ‘혼합형’ 운영 방식에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시중은행들은 블록체인 기업들과의 협업을 통해 디지털 자산 시장 진출에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한국은행의 CBDC 도입 시기가 확실하지 않은 데다 도입 방식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CBDC가 도입되려면 관련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하고 가이드라인도 만들어져야 해 아직 상용화는 먼 이야기”라며 “한국은행의 행보를 지켜보며 사업을 구상해야 하는 만큼 당장 시중은행이 주체가 되어 시장에 뛰어들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 또한 “특금법(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하 법률) 개정 논의에 따라 신속한 대응에 나서긴 했지만 직접적인 시장 진출은 부담스러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KB국민은행은 지난 11월 26일 합작법인 출범을 통해 디지털 자산 시장에 진출했다. KB국민은행은 블록체인 기술기업 해치랩스, 블록체인 투자사 해시드와 공통 투자해 디지털 자산 관리기업 ‘한국디지털에셋(KODA·Korea Digital Asset)’을 설립했다. KB국민은행은 “장기적으로 유무형의 자산들이 디지털화되면 이들 자산의 안전한 보관, 거래 및 투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금융 니즈가 생겨날 것으로 예상했다”며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의 실험을 통해 KODA를 디지털자산 시장의 은행으로 성장시키겠다”는 전략을 밝혔다.
앞서 신한은행은 디지털그룹 내 디지털R&D센터 ‘블록체인 랩’을 통해 가산자산 사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신한은행은 지난 10월 27일 LG CNS와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화폐 플랫폼을 시범 구축하는 업무 협약을 체결하고 사업 확장 가능성을 검토 중이다. 더불어 암호화폐 거래소 코빗과 가상자산 커스터디(수탁 서비스)를 위한 방안도 논의 중이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한국은행의 CBDC 파일럿에 발맞춰 어떻게 사업화를 할 수 있을지 검토하며 LG CNS와 기술 검증 중에 있다”며 “(합작사 설립 등의 이야기가 나왔던) 코빗과의 협업은 지분 투자 등 여러 가지 방식을 두고 구상 중이지만 결정된 것은 없다”고 전했다.
NH농협은행은 지난 6월 9일 법무법인 태평양, 블록체인 기술기업 헥슬란트와 컨소시엄을 구축하고 대응에 나섰다. 특금법 개정으로 디지털자산의 제도권 진입이 가시화됨에 따라 선제적으로 공동 대응에 나서겠다는 것. 3사는 업무 협약을 통해 디지털 자산분야에서 다양한 신규 비즈니스 모델을 공동연구하고 서비스 개발·출시에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합작사 설립 등의 구체적인 계획은 나오지 않은 단계다. NH농협은행 관계자는 “타행의 업무협약이나 합작사 설립 논의 등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는 단계”라며 “디지털자산 시장 확대에 따른 여러 가능성을 놓고 고민하는 중”이라고 전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