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3인자 전락 ‘정’ 붙일 데가 없다
▲ 지난달 15일 서울 연신내역 4거리에서 가진 민주당 재보궐선거 대책본부출정식에 나란히 자리한 손학규 상임고문, 정세균 전 대표, 정동영 상임고문(왼쪽부터). |
실제로 폴리뉴스 등 언론매체가 실시한 대의원 여론조사에서 정 고문은 손 고문, 정 전 대표에 이어 지지율 3위에 그쳤다. 정 고문 측은 “아직 경선 룰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현재의 여론조사 수치는 큰 의미가 없다”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정 고문이 당 조직력에서도 밀리고 있다”는 분석이 보태지면서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각정파의 분석을 종합해보면 ‘정동영 위기론’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선 조직력 면에서 최대 경쟁자인 정 전 대표의 위세가 간단치 않다. 그가 대표로 재임한 지난 2년간 새로 임명된 당협위원장들이 전체의 20%에 이른다. 게다가 그의 지역구(무주·진안·장수)가 있는 전북을 중심으로 호남세에서도 정 고문에게 밀리지 않는 수준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정 고문으로선 굳게 믿어온 ‘호남의 대표 주자’라는 수식어를 떼어내야 한다는 얘기다.
더구나 그는 수도권에서도 손 고문에게 밀리는 분위기다. 2008년 총선 당시 서울 동작 을에 출마했다가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고배를 마신 뒤 미국 연수를 떠났다가, 2009년 4월 재보선을 앞두고 느닷없이 돌아와 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주 덕진에 무소속 출마를 강행해 당선된 이력이 그에게는 수도권의 ‘당심’을 잃고 있는 치명타가 되고 있다. 일각에선 “서울 지역구를 버리고 텃밭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주워든 사람이 어떻게 당의 대표가 되느냐”는 이야기가 새롭게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한 당직자는 “정동영 고문이 호남에선 정세균 전 대표에게, 수도권에선 손학규 고문에게 표를 빼앗기는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면서 “당 대표 경쟁에서 사실상 힘들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정 고문이 속한 비주류모임인 ‘쇄신연대’ 내에서도 입지를 굳히기가 녹록하지 않다. 쇄신연대는 정동영-박주선-천정배의 3두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당 지도부가 집단지도체제로 전환돼 대표-최고위원의 통합선거가 실현되지 않으면 거의 깨질 분위기다. 천정배 의원 측은 “우리가 쇄신연대를 주도적으로 만들어서 누구보다 열심히 이슈를 제기하며 정세균 대표 체제를 견제했는데, 정동영 고문이 마지막에 숟가락을 얹어 대표 주자 행세를 한다”는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대표-최고위원 통합선거가 이뤄지면 함께 연대해 선거공조를 할 수 있지만, 분리선거가 될 경우 정 고문으로선 자신만 대표경선에 나서겠다고 박, 천 의원을 설득할 명분이 약해지는 것이다.
여론조사에서, 조직표에서도 정 전 대표와 손 고문에게 밀리고 있는 정동영 고문. 한때 정풍쇄신운동의 주역이자, 참여정부의 실세 장관이었고, 지난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후보였던 그가 이제 3위권의 주자로 전락한 것이다. 현재 분위기가 10월 초 전당대회 때까지 이어진다면 정 고문은 당권경쟁에서도 차기 대선후보 경쟁에서도 일찌감치 하차해야 한다.
이런 위기를 직감했음인지 정 고문은 지난 8일 장문의 ‘참회록’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는 ‘정동영의 반성문-저는 많이 부족한 대통령 후보였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신의 정치역정에 대해 “선배들이 오랜 투쟁과 희생을 통해 힘들게 올라온 가파른 길을 너무 쉽게 올라왔다”며 “국민의정부 시절 신념과 소신을 추구하는 데 거침이 없었지만 참여정부 들어 역동적이지도 헌신적이지도 못했다”고 반성했다. 그는 특히 대선 패배와 관련해 “최악의 참패로 정권을 넘겨줌으로써 10년 동안 국민이 키워준 개혁과 진보의 힘을 빼앗긴 장본인”이라며 “패배의 책임은 온전히 저에게 있다”고 시인했다. 지난해 4월 재보선 공천 배제에 반발해 탈당한 것에 대해서도 “당과 당원들에게 큰 상처를 드렸다. 고개 숙여 용서를 구하고 엎드려 사죄한다”고 했다.
그런데, ‘참회’는 딱 여기까지였다. 그는 참여정부 때 부동산 정책, 대연정 파문,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논란 과정에서 ‘침묵’했던 데 대해 “정권의 성패에 대해 공동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대통령에게 직언하지 못했다”면서 “현직 대통령과의 갈등이 두렵고 차기 대선에 대한 욕망 때문에 몸을 사렸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런 과오에 대한 반성으로 “담대한 진보의 길을 뚜벅뚜벅 걷겠다”고 밝혔다. 자신이 새로운 정치노선을 설명한 것이다. 그는 “담대한 진보의 핵심은 부의 재분배를 넘어 적극적으로 부를 창출하는 ‘역동적 복지국가’의 건설로, 역사적 소심증을 벗어던지고 당을 재무장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부분은 ‘석고대죄’를 통해 정치적 족쇄를 조기에 털어버리겠다는 의지표명, 뒷부분은 당권을 향한 출사표인 셈이다. 그는 “다시 태어나고 다시 헌신하려 합니다. 저의 이런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주시고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당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글로 참회록을 마쳤다.
하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네티즌 사이에선 “아직도 반성이 부족하다”, “그 정도로 과오가 용서될 것으로 생각했느냐”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지난 대선 당시 ‘BBK 저격수’로 불렸던 민주당 정봉주 전 의원은 “정 고문이 지난 대선 패배의 원인으로 ‘BBK로 상징되는 네거티브 선거운동에 매몰됐다’고 반성했는데, 대선 경쟁의 역사를 부정한 반성문은 잘못됐고 거짓”이라며 공개 사과를 요구하기까지 했다.
위기의 그림자가 도처에 널려 있는데도 정 고문 측은 “오히려 지난 대선 때의 정동영계가 다시 뭉치고 있는 분위기”라며 “정 고문의 진정성에 대한 이해가 넓어질 것”이라고 기대 섞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한 측근 인사는 “정 고문 주변에 남아 있는 현역의원이 한때 손으로 꼽을 정도라고 했지만, 최근에는 다시 20~30명 수준은 된다”고 자신했다. 차기 당 대표가 2012년 총선의 공천권을 행사하는 만큼 의원들은 모두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옛 계보 소속 의원들이 새롭게 정 전 대표나 손 고문과 손을 잡기보다는 ‘옛 인연’을 찾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 조직력의 복원이 어느 정도 이뤄질지는 아직 속단할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정 고문이 가을 전당대회의 ‘전설’을 만드는 데 이 뜨거운 여름나기가 최대 고비라는 것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