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인권 최후 보루로서 제 역할 못해 사죄”…변호인 “불법수사 규명 안돼 아쉬움도”
취재진 앞에 선 윤성여 씨의 소감은 짧았다. 12월 17일은 그가 평생 달고 살았던 살인범 꼬리표를 뗀 날이었다. 31년 만에 누명이 벗겨졌지만 그는 덤덤하게 말을 아꼈다. 몇 마디 말로 억울한 세월을 모두 담기엔 역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수원지방법원 형사12부(박정제 부장판사)는 12월 17일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0년 옥살이를 한 뒤 재심을 청구한 윤성여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윤성여 씨가 재판이 끝난 뒤 취재진 앞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수원지방법원 형사12부(박정제 부장판사)는 이날 이춘재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0년 옥살이를 한 뒤 재심을 청구한 윤성여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윤 씨는 31년 전 수원지방법원에서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날 재판은 박정제 부장판사가 약 50분 동안 판결주문을 읽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박정제 부장판사는 판결주문을 낭독한 뒤 “피고인(윤성여)이 이춘재 8차 사건의 진범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히 확인됐다. 재판과정에서 수사기관의 오류를 발견하지 못해 결국 잘못된 판결이 선고됐고 그로 인해 윤 씨는 2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옥고를 치렀다”며 “법원이 인권의 최후의 보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점에 대해 사법부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윤 씨에게 사과했다.
윤성여 씨는 1988년 9월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에서 발생한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렸다. 사건 발생 약 1년 뒤인 1989년 7월 화성경찰서에 끌려가 3일 동안 잠을 자지 못하는 등 경찰의 가혹행위 끝에 허위 자백을 했다. 윤 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에야 자신이 경찰의 강압 수사를 견디지 못하고 허위 자백했다며 항소했지만 기각됐다.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수원지방법원 법정.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재판부는 재판 과정에서 윤 씨의 변호인단이 주장한 대부분의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경찰이 윤 씨를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체포했고, 조사 과정에서 잠을 재우지 않았고,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윤 씨에게 앉았다 일어났다, 쪼그려 뛰기 등의 가혹행위를 한 사실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윤 씨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피해자의 집 담을 넘어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경찰의 현장검증 과정이 조작됐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이어 재판부는 당시 윤 씨가 범인으로 지목된 결정적인 근거가 됐던 음모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윤 씨의 음모 감정 결과 값과 현장에서 발견된 음모 감정 결과 값의 차이가 큰 점 등을 미뤄 동일인의 음모로 보기 어렵다고 봤다.
또 재판부는 이춘재의 자백이 범행 현장과 일치해 이춘재 진술의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피해자의 왼쪽 목에 표피박탈(찰과상)이 남아 있었는데, 이춘재는 양말을 양손에 장갑처럼 끼고 왼손으로 피해자의 목을 졸랐다고 진술했다. 또 피해자는 발견 당시 자는 동안 입고 있었던 본인의 속옷이 아닌 다른 속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춘재는 범행 이후 속옷을 새로 갈아입혔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춘재가 자신이 범행하지 않았다면 허위 자백할 아무런 동기가 없다고 판단했다.
윤성여 씨가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재판 전 피고인석에 앉아 있다. 윤 씨는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사진=이종현 기자
박정제 부장판사가 판결주문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피고석에 앉은 윤성여 씨는 표정의 변화 없이 박 부장판사를 응시했다. 가끔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였다. 재판부의 무죄 선고가 난 뒤 법정엔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윤성여 씨의 변호를 맡은 김칠준 변호사는 “오늘 재판부의 선고를 환영한다. 국과수 음모 감정 결과가 증거로서 신빙성이 없다거나 경찰 조사과정에서 나타난 부실함 등 변호인단의 주장이 대부분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하나 아쉬운 건 있다. 불법 수사를 한 경찰관 가운데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며 “변호인단은 앞으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에 나설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죄 선고가 나온 뒤 법정 안에선 박수 소리가 터졌다. 윤성여 씨가 박준영 변호사를 비롯해 법정 안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윤 씨 변호를 맡은 박준영 변호사는 “이춘재의 자백이 재심 청구를 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이렇게 오늘 무죄 선고를 받을 수 있었던 건 윤 씨가 살아나왔기 때문”이라며 “결국 윤 씨를 믿어준 박종덕 교도관, 나호견 수녀님 등이 있었기에 오늘 무죄 선고가 가능했다. 이분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기록에 남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윤성여 씨는 한마디 더 부탁한다는 부탁에 “벅찬 건 사실”이라며 “그동안 도와줬던 언론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춘재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가정집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자신의 방에서 자고 있던 박 아무개 양(당시 13세)은 성폭행당한 뒤 살해당했다. 그동안 이춘재의 범행이 아닌 모방 범죄로 알려져 왔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