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도 초록옷 입은 묘한 분위기에 이국적 감성 만끽…편백나무 숲 치유도
겨울에도 초록빛을 잃지 않은 숲이 있다.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의 머체왓 숲이다. 사진=이송이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여행의 프레임도 변하고 있다. 감염 위험을 피해 사람들이 많이 가는 유명 관광지 대신 최대한 사람이 적고 한적한 곳을 찾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 곧 볼 만한 곳이자 검증된 여행지란 인식에서 벗어나 나 스스로 나만의 여행지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됐다. 코로나19 시대에는 블로거 리뷰가 많을수록, 대중 매체에 소개가 많이 될수록 오히려 여행지의 매력도가 떨어진다. 아이러니하다.
그런 점에서, 사람 발길 드문 이국적인 숲길을 찾아 소개한다. 그래도 비행기 타고 떠날 수 있는 제주, 그 안에서도 유명 관광지와는 별 관계없는 한남리의 머체왓 숲길로 갔다. 동남아 지명 같기도 한 머체왓은 사실 제주 방언이다. 머체는 돌이란 뜻이고 왓은 밭이란 뜻이다. 한마디로 돌밭. 숲길이 돌밭으로 되어 있는 건가 싶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중간 중간 산촌의 흔적과 함께 돌담이 둘러져 있다. 이름에 대한 설은 또 있다. 인근에 머체 오름이 있는데 오름의 형태가 말의 모양과 비슷해 머체(마체)라고 이름 붙었다는 이야기다.
머체왓 숲길이 있는 한남리로 가려면 제주시에서 한 시간가량 차를 타고 남원 방향으로 내려와야 한다. 서귀포에서 더 가깝다. 서귀포에서 북동쪽으로 약 15km 지점에 있다. 한남리는 주민 95% 이상이 감귤농사를 짓는 전형적인 제주의 중산간 농촌 마을이다. 마을 면적의 72%가 초원지대다. 한남리 마을은 예부터 넓은 초원을 기반으로 목축업이 발달했다. 목장을 중심으로 사려니 오름을 비롯해 머체 오름, 멀동남 오름 등이 포진해 있다. 오름으로 나름 유명세가 있는 민오름, 붉은오름, 물오름도 멀지 않다. 입구에서 방목된 말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제주는 제주로군’ 하며 새삼 여행의 기분을 느낀다.
입구에서 방목된 말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제주는 제주로군’ 하며 새삼 여행의 기분을 느낀다. 사진=이송이 기자
머체왓 숲길은 사려니 숲길과 가까이 있지만 관광객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어느새 유명해져버려 입구부터 늘 차량과 사람으로 바글대는 사려니 숲길과는 다르다. 2030의 데이트 코스로 알려지면서 사람이 북적이고 여기저기서 ‘찰칵찰칵’ 소리가 난무하는 사려니 숲과 달리 머체왓 숲엔 아는 사람만 알음알음 찾아온다. 현지인도 잘 모른다. 입구에 도착하니 주차장에도 차량이 몇 대 없다. 숲길 트레킹을 하면서도 사람과의 마주침이 거의 없어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다. 나혼자 트레킹, 나‧혼‧트 하기에 제격이다.
머체왓 숲에선 숲의 여신이 시간을 멈추기라도 한 듯 모두가 한껏 초록이다. 사진=이송이 기자
숲길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편안한 기분이 밀려온다. 겨울의 파리하고 앙상한 나뭇가지가 아니라 초록 잎들까지 아직 왕성한 숲을 만났기 때문이다. 머체왓에선 숲의 여신이 시간을 멈추기라도 한 듯 모두가 한껏 초록이다. 저마다 초록을 뽐내는 숲속에서 마음껏 초록을 마신다. 초록으로 덮인 숲속은 공기도 사뭇 다르다. 초록 잎들이 내보내는 숲의 공기는 신선함 이상이다. 코로만이 아닌 온몸으로, 가능하다면 세포 하나하나를 열어 공기를 마시고 싶다. 겨울의 알싸함까지 더해져 공기는 한층 더 상큼하다. 겨울이니 겨울 점퍼를 입고 있지만 전혀 춥지 않다. 온통 초록의 나무들도 그리 추워 보이지 않는다. 뭔가 신비한 구석이 있는 이 나무들의 이름은 초록이 아닌 조록나무다.
걷다가 마주치는 계곡의 모습도 이국적이다. 머체왓 숲길 옆으로 서중천과 그 지류가 흐른다. 흐른다고 했지만 제주의 계곡에는 흔히 물이 흐르지 않는다. 물이 고일 틈 없이 현무암 밑으로 빠져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제주에서는 비가 흠뻑 온 뒤에라야 겨우 아주 잠깐 계곡에서 물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주의 계곡은 말라 있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그 마른 계곡의 모습이 기이한 느낌을 풍긴다. 물이 흐르지 않으니 돌이 미처 깎이지 못했다. 뾰족뾰족한 현무암들이 물도 없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모습이 중국 무협영화의 배경을 닮았다.
풍경에 취해 한참 걷다보면 화전농들이 집을 짓고 살았던 옛 집터도 볼 수 있다.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으로 얼기설기 담을 쌓고 살던, 가진 것 별로 없었을 산 속 작은 마을이다. 방도 부엌도 통시(흑돼지를 키우는 제주식 재래 화장실)의 흔적도 모두 남아 있다. 깊은 산중에서 뭘 해먹고 살았을까 싶다. 척박한 산에서 농사를 짓거나 도시의 빌딩에서 샌님처럼 가만가만 회사를 다니거나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사는 건 힘든 문제다.
얼기설기 쌓인 돌담들은 왜 여태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을까. 사진=이송이 기자
얼기설기 쌓인 돌담들은 왜 여태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을까. 바람 많은 제주에서 그토록 많은 돌담들은 왜 무너지지 않고 버텨지고 있는 걸까. 그건 아마도 얼기설기 쌓았기 때문이 아닐까. 돌들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구멍들로 바람도 통과하고 먼지도 통과하고 때론 사람의 마음까지 통과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너무 빡빡하게 꼼꼼하게, 물샐 틈 없는 나만의 성벽을 쌓으며 살지 말자는 교훈이 아닐까. 돌담은 그렇게 완벽을 넘어서는 허점의 매력을 상기하게 했다.
또 한참을 걷는다. 이 길이 얼른 끝나게 될까봐 조바심을 느낄 정도로 머체왓 숲길은 아늑하고 고요해서 한번 들어오면 빠져나가기 싫어진다. 겨울 한복판에서 여름을 누리는 듯, 계절을 거꾸로 가는 듯한 기분도 든다. 누군가의 품에 안긴 것처럼 포근하다. 발걸음은 푹신하고 공기는 ‘쨍’하다. 그러다 문득 편백나무 숲에 닿는다. 제주말로는 편백낭이다. 피톤치드니 면역력이니 그런 얘기를 굳이 안하더라도 편백낭 숲은 그 겉모습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편백낭 숲은 그 겉모습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낸다. 사진=이송이 기자
길고 곧게 뻗은 나무들이 1m 간격으로 무리를 이루고 있다. 풍경에 취해 잠시나마 그 속에 들어와 있는 자신의 모습조차 잊는다. 아니 좀 더 명확히 바라본다. 저절로 명상에 들어간다. 사람이 없어서 더 그렇다. 7km 가까이 걷는 내내 몇 사람 만나지 못했다. 도시에서라면 혼자라서 외롭기도 했을 테지만 아늑한 숲속에 들어오니 혼자인 것이 오히려 오롯하다. 내 숨에, 청량한 공기에, 피부로 느껴지는 바람에 세수를 하듯, 다시 깨끗해지는 것을 느낀다.
머체왓은 혼자만 알아두고 몰래몰래 꺼내 먹고 싶은 비밀의 숲이다. 사진=이송이 기자
걷다보니 어느새 출발지점으로 돌아왔다. 삶도 그랬으면 좋겠다. 멀어졌다가도, 길을 잃었다가도 다시 출발지점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굳이 출발지점으로 돌아올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멈춘 이 자리에서 지금 내딛는 한걸음이 바로 출발이니까. 2021년을 시작하며 걸어보기 좋은 숲길이다. 해외로 떠나지 못하는 갈증도 다소 채워준다. 머체왓은 혼자만 알아두고 몰래몰래 꺼내 먹고 싶은 비밀의 숲이다.
이송이 기자 runaindi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