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산 북측면 ‘김신조 루트’ 52년 만에 개방…아기자기 낙산구간, 인적 드문 다산성곽길 ‘굿’
11월 1일 북악산 성곽길 북측면이 52년 만에 개방됐다. 지난 10월 31일 문재인 대통령이 시민들과 함께 북악산 길을 함께 걷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새로 개방된 북악산 성곽길 북측면은 기존의 북악산 성곽길과 이어지며 북악스카이웨이와 접한 4개의 출입구로 진입할 수 있다. 청운대 쉼터에서 곡장 전망대에 이르는 300m의 성벽 외측 탐방로 구간에서는 한양도성의 축조 시기별 다양한 성곽 형태를 살펴볼 수 있다. 퍼즐처럼 끼워 맞춰진 여러 시대의 거뭇한 돌들은 마치 노인의 얼굴에 훈장처럼 새겨진 검버섯 같다. 50년 넘게 숨겨져 있던 길은 자연 보존 상태도 좋다. 한동안 통제됐던 북한산 우이령길이 개방됐을 때처럼 시민들에게 인기 만발이다.
이번에 개방된 북악산 성곽길.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18km 6개 코스’ 퇴근길에 문득, 한양성곽길
북악산 성곽길을 걷는 김에 사대문을 한 바퀴 휘돌고 있는 한양성곽길도 걸어보자. 한양성곽은 1396년 조선 건국과 함께 수도 방어 목적으로 축성됐다.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한양을 방어하던 한양도성을 옆으로 두고 걷는 길이다. 한양도성은 평균 높이 5~8m로 총 길이 18.6km다. 근대화와 일제에 의해 평지의 성곽 대부분이 헐렸다가 최근 복원됐다. 성곽이 복원된 뒤 만들어진 6개의 성곽길 코스는 서울의 가장 중심에서 아련한 역사를 켜켜이 간직한 채 시민을 맞고 있다.
서울 한가운데 들어앉은 한양성곽길 6개 코스는 총 18.6km로 산책삼아 걷기 좋다. 사진은 다산성곽길. 사진=이송이 기자
북악산(해발 342m), 인왕산(338m), 낙산(125m), 남산(262m) 등 4개의 산을 잇고 4대문인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정문(북대문)과 4소문인 혜화문(동소문), 소의문(서소문), 광희문(남소문), 창의문(북소문) 등 8개의 문을 품은 한양도성은 경복궁의 풍수를 중심으로 세워져 있어 낮이든 밤이든 서울을 발아래 둔 풍경이 장관이다. 자연의 구불구불한 능선을 훼손하지 않고 지형을 그대로 따라가며 쌓은 성곽은 이제 와서는 인간이 쌓은 돌담이 아니라 쌓이는 세월 따라 함께 자연의 일부가 된 듯도 하다.
한양성곽길 6개 코스는 백악구간(창의문~혜화문), 낙산구간(혜화문~흥인지문), 흥인지문구간(흥인지문~장충체육관), 남산구간(장충체육관~백범광장), 숭례문구간(백범광장~돈의문 터), 인왕산구간(돈의문 터~창의문)으로 나뉜다. 성곽 너머 먼발치로 종로의 높은 빌딩들과 동네 풍경들이 가만가만 어우러진다. 성곽길은 코스마다 걷다 쉬기 좋은 공원도 품고 있다. 북악산에는 와룡공원과 삼청공원이, 남산에는 N서울타워와 남산공원이, 낙산에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낙산공원, 마로니에공원 등이 있다.
#벽화마을과 카페까지, 레트로 어우러진 낙산구간
한양성곽길 낙산구간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뒤 낙산공원과 이어져 있어 대중교통으로도 접근이 편리하다. 퇴근 후 데이트 코스나 드라마 촬영지로도 인기다. 사진=이송이 기자
길은 잘 닦여 있지만 경사도 때문에 약간의 산행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다른 구간들에 비해 이화동 벽화마을과 연결된 낙산구간은 레트로가 대세인 요즘 데이트 코스로도 인기다. 장수마을과 이화마을을 통과하는 낙산구간은 누군가에게는 동네길이기도 한데 발랄한 벽화들로 채워진 마을길이 허름한 옛 집들과 어우러져 있다. 이화동 벽화마을과 이어진 길에 전망 좋은 카페도 여럿이다.
그래서인지 운동화나 플랫슈즈 정도면 양반이고 힐을 신은 사람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낙산공원까지 마을버스가 올라오기에 편하게 낙산의 성곽길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창신역에서 대학로, 종로5가, 동대문 등을 거쳐 낙산까지 올라오는 마을버스 종로03번을 타면 쉽게 성곽길이 이어진 낙산공원에 도착한다.
중간 중간 암문이 있어 문을 통과하면 이쪽저쪽을 통과해 왔다 갔다 하며 걸어볼 수 있다. 사진=이송이 기자
성곽을 사이에 두고 길은 양쪽으로 흐른다. 중간 중간 암문이 있어 문을 통과하면 이쪽저쪽을 통과해 왔다 갔다 하며 걸어볼 수 있다. 성곽 바깥쪽 길에서 보면 성벽이 높아 웅장해 보여도 성곽 안쪽에서 보면 그저 사람 키만 한 높이로 아늑함이 느껴진다. 사람이 걷기 좋도록 길이 잘 닦여있고 깔끔한 모습으로 정돈되어 있다.
#어딘가 숨고 싶은 날엔 비밀 산책로로, 다산성곽길
신라호텔부터 반얀트리호텔까지 특급호텔 뒤로 난 ‘은밀한 산책로’ 다산성곽길. 사진=이송이 기자
성곽길 6개 코스 가운데 남산구간 안에는 신라호텔부터 반얀트리호텔까지 특급호텔 뒤로 난 은밀한 산책로, 다산성곽길도 있다.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 5번 출구로 나와 100m쯤 걷다보면 장충체육관을 끼고 신라호텔 면세점 뒤편으로 난 데크 계단길을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길이다. 드문드문 인적을 만날 때면 마스크를 다시 매만지면서도 내심 반가운 기분마저 들 정도다. 코로나19 여파에 함부로 나서기 망설여지는 요즘에도 짐짓 안심하게 되는 길이다.
다산성곽길은 주변에 오래된 주택가가 있고 할머니들이 수시로 마실을 나오기도 하는 길이지만 비밀의 산책로로 불리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사진=이송이 기자
아직은 이 길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호텔 뒤로 은밀히 숨어있는 다산성곽길은 누군가에겐 여태 비밀 산책로였을지도 모른다. 평일 오전에 이 길을 걷다가 슈퍼스타였던 여배우와 정치인인 그의 남편, 어린 두 딸이 함께 산책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본 일도 있다. 유명인이 얼굴 가림도 전혀 없이 산책에 나설 정도로 이 길은 한적하고 나름 은밀하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데다 주변에 오래된 주택가가 있고 할머니들이 수시로 마실을 나오기도 하는 길이지만 비밀의 산책로로 불려지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진정한 성곽길의 면모를 보려면 성곽 안쪽 길보다는 바깥 길로 걸어야 한다. 오래된 돌들이 층층이 쌓여있는 모습에서 켜켜이 쌓인 세월을 읽을 수 있다.
다산성곽길은 전체 18.6km의 한양도성길 가운데서도 600여 년 역사의 변화상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길이다. 성곽 축성을 담당한 지역과 담당자명 등을 표기한 ‘각자상석’이 여러 곳에서 발견돼 시대별 건축기법의 차이를 관찰할 수 있다. 이끼 끼고 주름지고 바람 맞으며 역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이 든 돌들의 연륜이 그대로 묻어있다. 천천히,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 담담한 나이듦이 예쁘다. 나이든 돌들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거대한 성벽 틈바구니 속에 사는 바위의 단단함과 담대함을 배운다.
요즘처럼 집안에 틀어박혀 있기 쉬운 날들에는 거무튀튀해진 오래된 바위들을 마주하며 지그시 마음을 다잡아 볼 일이다. 이 순간이 안타까운 이유는 코로나19 같은 의외의 상황에 의해 자꾸만 미뤄지는 것들 때문이다. 그 사이에서 성곽길 산책으로 일상에 잔잔한 재미와 여유를 불어넣을 수 있다. 가을바람이 마음을 들었다 놨다 무시로 들썩이게 하지만 굳이 멀리 갈 필요는 없다. 한양성곽길은 사대문 안에 있어 가볍고도 만만하다.
“다 같이 돌자 산성 한바퀴” 반나절 산책 가능한 수도권 성곽길 #오래된 소나무길 걸으며 소설 속 장면 상상, 남한산성 신라시대,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축조돼 천 년이 넘도록 자리를 지키고 선 남한산성은 2014년 유네스코로부터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인정받아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서울의 동남쪽 끄트머리에서 성남, 광주, 하남을 아우르는 남한산성은 어느 쪽으로 올라도 가벼운 산행과 성곽길 산책을 두루 경험할 수 있다. 남한산 등산로 입구에서 시작해 산자락을 올라 성곽을 걷거나 차를 타고 남한산성행궁까지 편히 오른 뒤 능선을 따라 성곽길로 가벼운 산책을 해도 된다. 성남, 광주, 하남을 아우르는 남한산성은 어느 쪽으로 올라도 가벼운 산행과 성곽길 산책을 두루 경험할 수 있다. 사진=이송이 기자 7.7km의 성곽을 옆에 끼고 걷다보면 경기도 광주와 성남은 물론 서울 동부의 풍경까지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남한산성을 한 바퀴 도는 데는 3~4시간 걸린다. 남한산성 성곽길은 총 5개의 탐방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길이와 난이도에 따라 1시간에서 4시간까지 코스가 다양하다. 시내에서 산성마을까지 들어오는 9, 9-1번 버스를 타고 행궁이 자리한 산성로터리에 내리면 성곽길 걷기가 시작된다. 산성을 따라 걷는 길은 오르내림이 없어 힘겹지 않고 성곽을 따라 소나무 밑을 유유자적 걸어보는 여유를 부릴 수 있다. 부모님이나 아이 손잡고 걷기에도 수월하다. 체력적으로 산행이 부담스러운 이들에게도 추천할 만한 코스다.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남한산성은 전체가 자연보존지구다. 수도권 최대의 소나무 보존지구이기도 하다. 서울 근교에서는 드물게 80~100년생의 소나무 군락지를 만날 수 있다. 1900년대 초 무분별한 벌목이 한창이었던 시절, 남한산성의 마을사람들이 스스로 벌목을 금하는 금림조합을 만들어 소나무를 심고 보호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과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이 떠오른다. 영화 속 설경을 상상하며 산성길을 걷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압도됐던 설경의 기억이 선명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인조 14년(1636년)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47일 동안 항전했는데 영화 ‘남한산성’이 이때의 이야기다. 임금에게는 최고의 요새이기도 했던 남한산성에는 10개가 넘는 암문이 있다. 암문은 말하자면 비밀통로다. 적에게는 드러나지 않고 이쪽 편만 아는 쪽문이다. 성곽길을 걸으며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암문을 찾아내는 맛도 있다. #둘레 5.7km, 수원 한복판 시민의 안식처,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도심 한가운데에서 들어앉아 있어 친근하게 다가온다. 시내에 있다가도 금방 성곽으로의 접근이 가능하고 성곽을 걷다가도 바로 시내와 만나게 된다. 사진=이송이 기자 1794~1796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기 위해 화성성곽을 축조하고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했다. 정조의 꿈이 담긴 수원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여러 곳이 파손되고 훼손됐다가 1975년부터 복원과 보수 작업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이어오고 있다. 그 가치와 의미를 인정받은 수원화성도 남한산성처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화성에는 총 길이 5.6km의 성곽둘레길이 조성돼 있다. 둘레길을 한 바퀴를 돌아보는 데 대략 2~3시간 걸린다.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더라도 하나로 이어진 환형의 성곽길을 걷다보면 수원의 중심부를 저절로 둘러보게 된다. 성곽 둘레길은 숲 속이 아니라 그늘이 없어 한여름 낮에는 걷기 힘들지만 가을엔 언제든 걷기에 최적이다. 전망 좋고 쉬어가기 좋은 전각도 곳곳에 위치한다. 산책·마실 삼아 걷기 좋다. 장안문에서 멀지 않은 화서문 아래쪽 선경도서관 밑으로는 행궁의 경리단길이라고 해서 일명 ‘행리단길’도 있다. 트렌디한 카페와 소소한 맛집, 갤러리와 사진관, 게스트하우스 사이의 촘촘한 골목길은 2030의 데이트코스가 됐다. 수원화성에서 이국적 풍경을 자아내는 용연은 주말이면 돗자리를 깔고 책을 읽거나 치맥을 즐기는 사람으로 북적인다. 사진=이송이 기자 한양에서 내려오는 정조의 출입문이었던 까닭에 북문이면서도 정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을 잇는 대로 옆으로는 수원천이 흐른다. 수원천의 북쪽 수문인 화홍문 인근으로 놀라운 풍경을 자아내는 용연이 있다. 용연 주위로 높게 쌓아올린 성곽과 동북각루가 꽤나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장안문에서 화홍문을 거쳐 용연을 지나 연무대로 이어지는 이 길은 수원화성 둘레길의 가장 아름다운 길로도 꼽힌다. 주말이면 돗자리를 깔고 책을 읽거나 치맥을 즐기는 사람으로 북적인다. 수원천을 따라 1km 정도 걸어 나오면 영화 ‘극한직업’으로 유명세를 탄 ‘통닭거리’도 만날 수 있다. |
이송이 기자 runaindi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