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하긴 한데…우리 가게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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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중구 광복로 간판정비사업 전후. 사진제공=부산중구청 |
최근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공공디자인 개선사업의 일환으로 간판 정비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 중이다. 가로간판, 돌출간판, 지주이용간판 등 건물에 빈 공간만 있으면 너도나도 두세 개씩 간판을 설치해 건물외관을 어지럽게 만드는 행위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자치단체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기본적인 규정은 비슷하다. ‘간판의 총 수량 제한’ ‘규격과 면적의 축소’ ‘간판 정보량의 최소화’ 등이 공통된 사항이다. 이에 너무 많고, 너무 크고, 너무 튀었던 간판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2007년 종로 대학로, 중구 남대문로, 구로 창조길 등 ‘디자인 서울거리’ 사업에서 선정된 10개 지역 1500여 개의 간판이 개선됐고 이후 영등포의 여의나루길, 강동구청 앞길, 서초 반포로 등 20여 개 지역이 2차로 선정, 간판 개선 작업을 끝냈다.
부산시에서는 2004년 중구 피프(PIFF)광장 일원을 시작으로 간판시범거리 사업에 착수해 ‘특색 있는 거리’라는 시민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이후 옥외광고물 미관개선 및 정비에 시민들의 자율적인 참여를 유도해 2008년에는 부산진구 롯데백화점 앞, 부산진경찰서~영광도서 입구, 서면교차로~부전도서관, 남구 대학로 용소삼거리~교통방송 부산본부 구간을, 2009년에는 동래구 온천장, 온천약국~온천극장 구간에 대해 간판 정비 사업을 진행했다.
전남 곡성군 곡성읍의 경우 일부 지역이 아닌 읍 전체의 간판을 정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곡성군에 따르면 2008년 5월부터 7억 4000만 원을 들여 곡성읍 일대 380개 점포에 설치된 간판 교체 작업을 실시, 거리에 난립했던 간판을 깔끔하게 정비했는데 ‘대도시보다 깔끔하게 잘 정비됐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호평이 이어졌다는 후문이다.
일단 바뀐 간판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지난해 12월 서울시에서 모빌리쿠스, 리서치앤리서치 등 여론조사기관을 통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서울시민의 96%가 ‘간판 개선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하고 앞으로 더욱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간판 개선 작업에 참여한 가게 주인들의 반응은 어떨까. 서울 서대문구에서 분식점을 운영하는 강미애 씨(46)는 “깔끔한 외관도 마음에 들지만 무엇보다 형광등에서 LED 간판으로 교체했더니 전기료가 절반 이상 줄어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서울 강동구에서 칼국수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박진철 씨(48)도 “그러지 않아도 오래된 간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시범거리로 지정되면서 비용을 지원받아 무상으로 간판을 교체했다. 깔끔해진 간판에 새로 개업이라도 한 것 같다”며 흐뭇해했다.
그러나 모두가 강 씨나 박 씨처럼 만족도가 높은 것은 아니었다. 서울 강동구에서 컴퓨터수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이 아무개 씨는 “가뜩이나 장사도 되지 않는데 간판 정비 사업으로 낭패를 봤다”며 볼멘소리를 냈다. 8년 전 창업에 나선 이 씨는 기존 점포를 인수하면서 비용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간판 전체를 교체하지 않고 천갈이 방식으로 간판을 바꿨다. 그런데 얼마 전 구청으로부터 ‘불법옥외광고물 시정요구 통지’를 받은 것.
이 씨는 기존 간판을 철거하지 않고 판갈이, 천갈이만 하는 것도 표지변경으로 허가 사항임을 몰랐던 것이다. 몇 차례 독촉 통지에 이어 기간 내 간판을 철거하지 않으면 이행강제금을 부과하겠다는 내용증명을 받고서야 이 씨는 마지못해 간판 교체에 나섰고 결국 50만 원의 비용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이 씨는 “불법간판을 교체하는 것이라 지원금은 전혀 없었고 100% 자비를 들였다. 그런데 기존 간판보다 크기가 줄었고 작은 글씨가 잘 보이지도 않아 장사가 더 안 되는 것 같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프랜차이즈 본사들도 황당하다는 입장이다. 최근 서초구청에서 간판 정비 구역으로 지정, 간판을 교체했다는 한 외식업체 관계자는 “프랜차이즈의 특성 중 하나가 디자인의 통일성이다. 그중에서도 간판은 소비자들이 브랜드를 가장 먼저 인지할 수 있는 부분이어서 신경을 많이 쓰는 부분이다. 그런데 기존 형태의 간판이 아닌 구청에서 확정된 시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해 다소 변형된 형태의 간판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이 관계자는 또 “시공업체도 구청에서 지정한 업체를 이용해야 해 불편이 많았고, 200만 원 정도의 지원금이 나왔지만 간판이 커 추가로 200만 원이 더 들었다”고 덧붙였다.
고층건물 4층에 위치하고 있는 한 외식업체 운영자는 “서울시에서 가로간판을 3층 이하에만 표시할 수 있도록 해 기존 간판을 떼어내야 할 판”이라며 “앞으로는 자그마한 돌출간판 하나로 손님을 끌어야 하는데 가시성이 떨어지는 만큼 매출 하락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라며 울상을 지었다.
전문가들은 기존의 복잡하게 난립했던 간판을 깨끗하게 정비한다는 취지에서 간판 정비 사업에 일단 찬성하고 있다. 그러나 지자체마다 조금씩 다른 규정과 단순히 간판과 글자의 크기를 제한하는 것으로 아름다운 거리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인테리어 전문회사 엠뷰(m-view) 김동남 디자이너는 “건물의 색깔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간판의 난립이 심한 곳도 있었는데 최근 간판 정비 사업으로 몰라보게 깔끔해진 모습에 놀랐다. 그러나 업종의 특성과 상관없는 지나친 획일성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매장 인테리어에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간판은 오히려 손님의 발걸음을 떨어뜨릴 소지가 크다”고 주장했다.
서울시 강동구 도시관리국의 한 관계자는 개인적인 의견을 전제로 “현재는 정비가 주된 목적이기 때문에 규정을 획일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4차선 이상 도로에서 2차선 도로, 이후 뒷골목까지 어느 정도 정비가 완료되고 난 뒤에는 디자인에 대한 자율성이 좀 더 주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밝혔다. 각 자치단체의 간판 정비 사업에 많은 사람들이 지지를 보내고 있지만 모두를 만족시키기에는 아직 부족해 보인다. 귀한 세금을 헛되이 쓰지 않으려면 가게 운영자 및 전문가들의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할 듯하다.
김미영 객원기자 may424@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