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후반전’부터 ‘실점 만회’ 공세?
▲ 지난해 5월 ‘박연차 게이트’로 검찰에 조사를 받고 귀가하는 천신일 회장 모습. 검찰은 최근 대우조선해양 비자금 사건 관련 천 회장에 대해 수사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
실제로 ‘박연차 게이트’ 수사 이후 이렇다 할 대형 사정 수사가 없었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및 특수 수사진의 움직임도 바빠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검찰이 수사하고 있는 두 개의 사건이 눈에 띈다. 하나는 대우조선해양 남상태 사장의 연임로비 의혹이고, 다른 하나는 대구지역 토호인 최 아무개 씨의 비자금 조성 의혹이다. 이 사건들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현 정권 최고 실세들의 이름이 수사 과정에서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 주변에서는 ‘검찰이 권력 핵심부를 겨눠 그동안 실추됐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과연 검찰은 살아 있는 권력 핵심부를 정조준할 수 있을까.
대구지검은 최근 대구지역 한 화물운송업체의 경리과장이 회사 돈 20억 원을 횡령한 혐의에 대해서 수사를 벌이다 뜻밖의 대어를 건졌다. 이 회사 대표가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한 내용이 담겨 있는 각종 증빙 서류를 경리과장으로부터 건네받았기 때문이다.
이 자료를 검토한 검찰은 이 회사 대표가 비자금 80억 원가량을 조성했다는 혐의를 잡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이 회사의 대표는 대구 경북 지역에서 유명한 지역 토호인 최 아무개 씨다. 그는 총 8개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중견 재벌인 데다가 지역 관변 단체의 대표이자 전직 경북도의회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검찰이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비자금의 용처다. 검찰에서는 최 씨가 지역 정·관계 인사들과 가깝게 지내왔고, 특히 현 정권 실세인 한나라당 L 의원과도 잘 알고 있는 사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현재까지 두 사람이 접촉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고 있지만 아직은 수사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대형 비리사건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이번 사건이 단순 개인 비리로 마무리될 것이라는 관측도 없지는 않다. 한 검찰 관계자는 “아직은 의혹 수준이다. 그리고 정치권 관계자들, 특히 정권 실세가 연결됐다 하더라도 실제 수사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떨어져 있는 상황에다 이명박 정권이 반환점을 돌아 후반기로 접어들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검찰의 사정 칼끝이 정권의 심장부를 겨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통령의 오랜 친구인 천신일 세중나모여행사 회장이 대우조선해양 남상태 사장의 연임에 관여했다는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에서도 이런 징후는 감지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지난 8월 27일 대우조선해양 협력업체인 임천공업 대표 이수우 씨를 거액의 회사 돈 횡령 혐의로 전격 구속시켰다.
검찰은 지금까지 이 씨와 주변 인물의 계좌추적, 압수수색한 회계자료 분석, 임천공업 임직원 소환조사 등을 통해 이 씨가 600억∼700억 원 규모의 회사 돈을 빼돌린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 씨가 “빼돌린 돈을 대부분 회사 운영을 위해 썼다”고 주장하고 있는데다 임천공업과 대우조선해양 계열사 간 내부거래를 통해 횡령액이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있어 정확한 비자금 규모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검찰은 이 씨가 빼돌린 자금 가운데 얼마를 개인적 용도로 썼는지, 대우조선해양으로 흘러간 자금이 있는지도 조사할 계획이다.
이제 검찰의 칼끝은 대우조선해양 남상태 사장의 연임 로비 의혹으로 향하고 있다. 일부 언론과 민주당 등은 노무현 정부 때 대우조선해양 사장에 임명된 남 사장이 현 정권 핵심 인사들에게 로비를 해 사장직에 연임됐다는 의혹을 줄기차게 제기해 왔다. 특히 대우조선해양이 2008년 임천공업에 570억 원의 선급금을 건넸고, 이명박 대통령의 오랜 친구인 천신일 회장의 자녀 3명이 임천공업 등 이 씨가 경영하는 회사의 주식을 대량 보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의혹은 더욱 커지고 있다. 검찰은 당시 천 회장 자녀들과 임천공업의 주식거래 과정이 정당했는지, 그리고 주식거래의 자금원은 어딘지를 밝히는 쪽으로 수사를 확대할 방침이다.
사실 두 달 전 임천공업에 대한 수사가 처음 시작될 때만 해도 검찰 내부에서는 천 회장에 대한 수사로까지 이어질지 반신반의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담당 수사진들 사이에서는 수사를 확대해야 한다는 내부 기류가 강했지만 이를 위해서는 천 회장에 대한 계좌 추적 등을 강행해야 하는데 과연 윗선에서 이를 허락해줄지에 대한 의문의 목소리가 많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검찰 윗선에서부터 강경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면서 천 회장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를 진행하는 것으로 내부 방침이 정해졌다. 실제로 특수1부 수사진들은 현재 천 회장에 대한 본격적인 계좌 추적을 진행하고 있다.
검찰은 대우조선해양 설계 용역 회사인 D 사의 지분 25%를 인수한 K 사의 이 아무개 대표가 ROTC 중앙회장을 지내며, 역시 ROTC 중앙회 간부를 지낸 천 회장과 가깝게 지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D 사가 천 회장과 관련이 있는 K 사에 지분 25%를 매각한 것은 남상태 사장 로비 의혹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 일선 수사진의 판단이다.
검찰 관계자들은 ‘박연차 게이트’로 곤욕을 치렀던 천 회장이 다시 한 번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을 가능성에 힘을 싣고 있다.
취임 후 크고 작은 시련을 겪었던 김준규 검찰총장이 그동안 추락한 검찰의 위상을 곧추세우기 위해 대대적인 사정수사에 나설 방침을 세웠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실제로 김 총장은 8월 30일 열린 전국특수부장 회의에서 후반기 사정 수사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공정한 검찰과 신사다운 수사를 내세우고 있는 김 총장이 과연 정권 실세들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수사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지켜보면 정권 후반 검찰의 무게 중심이 어느 쪽으로 쏠려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