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약’ 썼는데 ‘약발’은 미지수
▲ 8·29부동산 대책이 시장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책 발표 직전 송파구 잠실동의 리센츠 주위 부동산에는 매물도 거의 없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대부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파격적 부동산 대책이 나온 후 일주일. 실제로 약발을 받는 곳이 일부 지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3일 부동산정보업체 닥터아파트에 따르면 지난주(8월 28일~9월 3일) 서울 종로구(0.03%), 동대문구(0.02%)가 상승세를 보였으며, 경기도 광명시는 0.01% 올라 5주 만에 상승세로 돌아섰다. 수도권 아파트값 하락폭도 8월 중순 이후 4주 연속으로 조금씩 둔화(-0.08%→-0.07%→-0.06%→-0.05%)되고 있다.
서울 강남권에서는 집주인들이 호가를 조정하는 곳이 나타났다. 강남구 개포1단지 부동산중개업소 W 공인 김 아무개 사장은 “개포1단지 42㎡형을 7억 7000만 원에 사겠다는 매수희망자가 나타났으나 매도자가 호가를 높이며 팔지 않겠다고 해 거래가 성사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 S 공인 최 아무개 사장도 “시세보다 1000만~2000만 원 내려 팔겠다던 집주인들이 대책 발표 직후 일제히 매도호가를 올렸다”고 전했다.
하지만 대부분 지역의 분위기는 아직 썰렁하다. 최근 입주 물량이 일시에 몰리면서 급매물이 쌓이고 있는 파주시 교하읍 S 공인 최 아무개 사장은 “대책 이후 문의전화가 더 오거나 분위기가 달라진 건 없다”며 “아직 집값이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인근 N 공인 이 아무개 사장도 “급매물이 좀 팔릴 것으로 기대하고 그동안 매수 의향을 밝힌 사람들에게 전화해 봤는데 대부분 시큰둥했다”고 전했다. 고양시 탄현동 두산건설 위브더제니스 견본주택 담당자는 “고객들이 눈치를 보는 것 같다”며 “현장에선 아직 크게 달라진 건 못 느낀다”고 밝혔다. 사실 시장의 관망세는 더욱 심화되는 분위기다. 당장 규제완화 효과에 대한 기대감으로 매도자들이 급매물을 거둬들이고 있지만 매수자들은 여전히 집값이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매수를 미루고 있어서다. 집주인들이 급매물을 거둬들이고 호가를 올리는 데 이를 따라가는 수요는 없으니 거래는 더 안 되는 것이다.
분당 야탑동 H 공인 채 아무개 사장은 “아직은 매수심리가 따라오지 않고 있다”며 “좀 더 시장 분위기를 본 후 매수에 나서겠다는 사람만 있다”고 상황을 전했다. 박합수 국민은행 부동산팀장은 “8·29 대책은 매도자들에게 희망을 준 조치지만 시장 분위기는 아직 밝지 못하다”며 “매수자와 매도자 간 시각차가 커 추석 전후까지 거래가 활발히 일어나긴 어려운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부동산 시장에서 9~11월은 분양도 많고 거래도 활발해지는 성수기로 통한다. 이번 규제완화 효과가 나타난다면 이때가 될 것이란 전망은 그래서 나온다. 역세권 등 인기 지역은 추석 전후로 급매물이 들어가고 일부 상승세로 돌아서는 곳도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대책이 매수자들을 집을 사도록 유인하는 데 성공할까. 사실 이번 대책으로 시장이 다시 상승세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하긴 어렵다는 관측이 많다. 금리 인상이 최소 0.25%, 많게는 0.5% 이상 예상되고 있기 때문에 무리하게 금리 부담을 안고 대출을 더 받아 불확실한 내 집 마련에 투자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미국 경기가 더블딥(이중침체) 위기를 겪고 있는 등 거시경제 상황도 좋지 않다.
곽창석 나비에셋 사장은 “집값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지금 누가 대출 여력이 더 생겼다고 돈을 더 빌려 집을 사겠느냐”며 “10월 이후 급매물이 더 늘어나 약보합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추석 전후 내 집 마련에 적극 나서기보다는 더 기다리라는 조언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안명숙 우리은행 부동산팀장은 “지금 8·29 대책에 대한 기대감으로 급매물이 들어갔지만 곧 다시 대거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며 “그동안 시세 하락폭이 컸던 수도권 남부지역 등에서 현재 시세보다 10% 정도 더 싸다면 실수요 차원에서 노려볼 만하다”고 말했다.
김중겸 주택협회 회장(현대건설 사장)은 8·29 대책 직후 기자들과 만나 “이번 대책은 그동안 업계에서 요구한 내용이 대부분 반영됐다”며 만족감을 표현했다. 대한건설협회 관계자도 “이번 대책으로 그동안 실수요자(무주택자 및 1주택자)들의 거래를 막고 있던 DTI가 사실상 폐지됐고 아파트 가격도 떨어진 상태여서 거래가 활성화되고 시장이 정상화될 것으로 전망한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이 같은 기대를 저버리고 이번 대책이 특별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일부에서는 이번 대책으로 집값의 하락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는다. 업계에서 줄기차게 요구한 DTI 폐지 등을 했는데도 시장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매수 심리는 더욱 꺾일 가능성이 커서다. 구조적인 가격 하락으로 침체의 폭이 더 깊을 것이란 점을 확인해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업계에선 거래활성화를 위해 아직 더 요구할 것이 남아 있다. 분양가상한제 폐지 등 다양한 것이 있지만 강남 3구(강남 서초 송파구)를 DTI 규제완화 대상에 포함시키고, LTV(담보인정비율)까지 풀어 달라는 요구다. 돈 있는 사람들이 움직여야 시장이 살아날 것이라는 주장이다.
김부성 부동산부테크연구소장은 “집값이 상승세로 전환하려면 주택 수요가 가장 많고 시장 파급효과가 큰 서울 강남권이 먼저 움직여야 하는데 강남권은 DTI 완화 지역에서 빠졌기 때문에 시장에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이라며 “강남권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추가 대책을 내놓을지, 업계가 어떤 요구를 더 할지는 이번 대책에 대한 시장의 반응에 달려 있다.
박일한 중앙일보 조인스랜드 기자 jumpcut@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