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천안함 보고서’에 뭔가 있다
▲ 세계정책포럼에 참석 중인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0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지난 9월 초 청와대가 이명박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계획을 발표하자 외교가에서는 이례적인 스케줄에 미심쩍은 반응이 흘러나왔다. 청와대는 매년 초 대통령의 공식 순방 일정을 일괄 발표한다. 국장 등의 급한 사안이 아니면 1년 단위의 방문 일정에 충실히 따른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이번 방러는 애초 계획된 올해 외국 순방 일정표에 없던 것이었다. 특히 이번 러시아 전격 방문은 외교 분쟁 같은 긴급한 상황을 해결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대통령의 개인 프로젝트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주목적이라 더욱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청와대 측은 “야로슬라블 세계정책포럼은 메드베데프 대통령 개인 프로젝트다. 이 대통령이 야로슬라블에 가면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며 친분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서 미국 위주의 일방외교 때문에 러시아와의 관계도 경색된 상태라 대통령 개인 차원의 친분 쌓기 방문이 어색하다는 게 외교가 반응이다. 또한 이번 포럼에는 이 대통령과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 등 세계정상은 두 명만 참가하는 것도 이례적인 방문의 정당성이 떨어지는 대목이다.
초청 주체를 두고도 양국의 말이 엇갈린다. 청와대는 이번 방문이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의 특별초청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지만 외교가에서는 다른 말도 나오고 있다. 외교가의 한 소식통은 “러시아 정부 관계자가 ‘사실은 우리가 먼저 초청한 게 아니고 한국 정부 쪽에서 야로슬라블 세계정책포럼에 참석하겠다고 먼저 알려와 이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이 성사된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더구나 이 대통령은 올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와 일본에서 열릴 아펙 정상회의 때 러시아 정상과의 연쇄 회동이 예정돼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한국 정부가 왜 예정에 없던 이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에 적극적인지 궁금해 하는 분위기”라는 말도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왜 이 대통령이 러시아를 급하게 방문해야만 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이 대통령의 전격적인 러시아 방문이 천안함 침몰 원인을 놓고 어색해진 양국의 관계와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민주당 등 야당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천안함 조사 결과와 관련해 입장차를 보였던 양국의 견해를 조율하고 그것에 상당하는 ‘경제적인 딜’을 했을 가능성까지 제기하고 있다.
사실 천안함 사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5월 20일 발표한 천안함 민군 합동조사단의 결론에 대해 우리 국민들은 32.5% 정도만 신뢰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국민들의 불신 때문에 이 대통령으로서는 천안함 사태의 정치적 후폭풍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CIA 출신인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의 최근 발언도 심상치 않다. 그는 최근 한 언론 기고에서 러시아가 왜 천안함 조사결과를 밝히지 않았는지에 대해 ‘믿을 수 있는 러시아 친구’에게 들은 얘기라며 “그것(조사결과)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큰 정치적 타격이 될 수 있고 오바마 대통령을 당황스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렇듯 러시아가 천안함 사태의 최종 관문이 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방러 발길을 서두르게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래서 정치권 일각에서는 “어차피 답답한 쪽이 한국정부인데 이번에 이 대통령이 러시아의 천안함 보고서와 바꿀 만한 경제 협력 패키지를 들고 갔을 가능성이 크다”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민주당의 한 초선 의원은 이에 대해 “최근 들어 일부 언론에서 러시아의 천안함 자체 보고서 요약본이 보도되는 등 여론의 불신이 확산되자 이에 당황한 정부가 러시아와의 적극적 공조 등을 통한 공세적 대응에 적극 나선, 전략의 완결판이 이 대통령의 깜짝 러시아 방문이었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경제적 딜도 충분히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번 국정감사에서 천안함 사건과 그 조사결과에 대해 철저하게 따지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천안함 사태 초기부터 야당의 저격수로 활약해온 민주당 최문순 의원도 비슷한 지적을 하고 있다. 그는 이에 대해 “국민들은 정치적 타협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라며 “러시아에 뭔가 내줄 것이다, 그리고 천안함을 무마할 것이 아니냐 이런 의심이 상당히 높아지는 것이다. 이번 방문이 예정에 없던 방문이고 최근 국방부가 (보고서) 발표를 계속 미루고 있는 것도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러시아로서는 천안함 사태와 관련해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다목적 카드를 쥐고 있는 셈’이라는 지적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최 의원은 이에 대해 “말하자면 러시아로서는 이 문제가 꽃놀이패다. 그리고 러시아뿐만 아니라 주변 4강이 전부 이 상황을 즐긴다고 본다. 왜냐하면 북한이 천안함을 침몰시켰다는 주장은 상당히 강한 반면에, 그 증거가 박약하고 여러 가지 모순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외교적으로 인정을 받으려니까 우리가 약자의 입장에 있고 계속해서 뭔가 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아쉬운 입장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한편 러시아 정부는 천안함 침몰 원인을 분석한 보고서를 한국 정부에 전달할지에 대해 고심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 언론이 그 요약본을 보도했는데, 여기에는 한국 정부의 민군합동조사단(합조단)이 제시한 결정적 증거물인 ‘1번 어뢰’ 등에 대한 의문과 함께 ‘천안함 스크루가 해저 면에 접촉해 손상을 입은 후 기뢰 폭발로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라는 결론이 담긴 것으로 알려져 한국 정부의 조사 결과와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런 양국 간의 시각차 때문에 러시아 언론에서도 이 대통령과 메드베데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천안함 문제가 거론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이 천안함 사태 해결뿐 아니라 경색된 남북관계를 뚫기 위한 ‘우회로 전략’이라는 관측도 있다. 이명박 정권 들어 통일정책이 무용해진 상황에서 남북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해 이 대통령이 ‘특사’로 나서 러시아와의 획기적인 경제협력 강화를 맺으러 갔다는 분석이 그것. 최근 이 대통령은 “조만간 고속철도가 머지않아 북한을 거쳐 러시아와 중국으로 가는 시대가 올 것이기 때문에 미리 대비해야 할 것”을 지시했다. 외교가의 한 소식통은 “이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경제협력을 매개로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우회적으로 압박하는 전략을 쓴다고 본다. 러시아와의 관계개선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경제개발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것으로 천안함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동시에 러시아가 북한에게도 남북관계 회복을 위한 압력을 행사하도록 요청하는 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러 러시아 방문을 전격 결정했다고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해 “제2의 개성공단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라고 천명한 데서도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러시아를 전격 방문한 배경에는 메드베데프 대통령과의 한가한 친분 쌓기보다 천안함 침몰 원인 규명에 대한 러시아의 비우호적 태도를 경제협력으로 달래고, 꽉 막힌 남북관계의 우회로를 확보하기 위한 시급하고도 전격적인 결정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