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서명란에 반대 항목 없는데다 사측 강요”…사측 “위법 사항 없지만 제도 개선할 것”
SK하이닉스 기술사무직·전문직원들이 처우 변경을 두고 사측과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사진=일요신문DB
SK하이닉스는 최근 기술사무직을 대상으로 ‘Self-Design(셀프-디자인)’이라는 새로운 인사평가를 도입하기 위해서 설명회를 진행 중이다. 설명회 이후 직원들의 동의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문제는 ‘Self-Design’은 전사 기준 2018년에 이미 도입된 제도라는 점이다. 3년이 지난 후에야 동의 절차를 밟은 셈이다. 동의를 받는 과정에서도 뒷말이 나온다. 인사평가 변경에 동의하냐는 서명란에 ‘반대’ 항목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측이 직원들에게 동의를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 노조 측 등의 주장이다.
한 SK하이닉스 직원은 “각 부서 팀장들부터 상무까지 전 직원에게 무조건 동의하라고 강요하고 있다”며 “반대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방법이 도저히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Self-Design’을 두고 노조 등은 업적급 비율의 높낮이를 사측이 일방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기술사무직의 연봉은 기준급, 업적급으로 구성된다. 기준급은 기본급, 시간 외 수당이다. 업적급은 기준급을 12로 나눈 후 업적급적용률(기본 800%)을 곱한 값이다. SK하이닉스는 ‘연봉제 급여규칙’에 근거한 종합평가에 따라 업적급적용률을 EX(1000%), VG(900%), GD(800%), BE(700%), UN(600%) 등 5개 등급으로 산정한다. 하지만 ‘Self-Design’이 도입되면 사측에서 이 업적급적용률을 마음대로 산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노조의 주장이다.
‘Self-Design’ 도입과 뒤늦은 동의 절차는 현행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근로기준법 제94조에 따르면 사측은 취업규칙을 작성하거나 변경할 때 과반수의 노동자로 조직된 노조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노조가 없다면 노동자 과반수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특히 취업규칙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는 경우엔 노동자 동의를 받아야 한다.
김유경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2018년부터 취업규칙을 동의 없이 불리하게 변경한 것은 절차상 하자가 명백해서 불이익을 받은 직원들은 그 차액을 사측에 청구할 수 있다”며 “설령 지금 과반수 동의를 구해서 효력이 작용하더라도, 노동자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따른 것도 아니고 개별 근로계약서가 취업규칙보다 유리하다면 근로기준법 제4조에 따라서 개별 근로계약서가 우선 효력을 갖는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가 3년 만에 기술사무직원들 동의를 구하고 나선 배경으로 노조 설립이 꼽힌다. 기술사무직원들은 2018년까지 한국노총 산하 청주·이천공장의 전임직(생산직) 노조가 타결한 임금 및 단체협약 협상(임단협)을 그대로 적용받았다. 기술사무직원들이 사측에 별도로 교섭을 요구하거나 불합리한 일에 대해 시정요구를 할 힘이 없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2018년 9월 민주노총 산하 SK하이닉스 기술사무노조가 출범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사측도 더 이상 기술사무직원들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급여체계를 변경하기 어려워진 셈이다.
기술사무노조는 ‘Self-Design’ 도입 등을 두고 회사 안팎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경기지방노동위원회에 근로기준법 위반 등으로 진정서를 제출하고 사측에 1차 공문을 보내 ‘업적급 삭감’에 대한 공식 입장을 요구했다. 올해 1월에도 2차 공문을 보냈다. 사측은 13일까지도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에 기술사무노조는 소송을 통해서라도 사측의 부당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SK하이닉스가 근로자의 처우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적법한 과정을 통해 직원들의 동의를 받지 않았다면 현행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사진=일요신문DB
SK하이닉스가 직원들의 급여체계를 일방적으로 변경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고등학교·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입사한 전문직의 급여체계를 기존 기준급, 시간 외 수당, 업적급에서 기준급1, 기준급2로 분리지급하도록 기준을 변경했다. 시간 외 수당, 성과급 등의 기준이 되는 기준급을 2개로 나눠서 인건비를 낮추려 한다는 것이 노조 측의 설명이다.
전문직 연봉을 최고 5600만 원으로 제한하는 ‘Ceiling(셀링)’ 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매년 물가상승률이 높아지고, 근속 연수가 길어진다고 하더라도 직원 연봉이 상한선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사측은 직원들에게 “상한금액이 없다면 신입사원과 연봉 차가 커질 수 있어 허탈감을 줄 수 있다”고 제도 도입 배경을 설명했다. 이 제도 역시 지난해 설명회 이후 직원 동의 절차를 밟았다.
전문직 급여체계 변경, ‘Ceiling’ 제도 역시 기술사무직의 ‘Self-Design’ 도입처럼 직원들이 반대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는 것이 노조와 일부 직원의 주장이다. 서명란에 ‘반대’ 항목도 존재하지 않았고 일부 직원들이 서명을 거부하면 각 부서 팀장부터 상무까지 개별적으로 접촉해서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의 다른 직원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 대해 부서장 책임 하에 이의 없다는 취지의 확인서에 직원들이 연서하는 것이 강요와 다를 바 없다”며 “회사가 조직적으로 개입·간섭하는 상황에서 일개 직원이 거부하기란 쉽지 않고, 이는 집단적 의사결정에 의한 동의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유경 노무사는 “연봉을 상한하는 것이 위법 요소는 아니다”면서도 “다만 직원들의 동의를 받는 과정에서 하자가 발생했거나, 개별 연봉계약서에 명시된 조건을 불이익하게 변경했다면 효력이 무효화된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SK하이닉스 관계자는 “회사는 근로기준법상 위반 사항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으며 구성원들과 지속 소통을 통해 인사 제도를 개선·보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상대평가의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절대평가인 ’Self-Design‘을 도입한 것이고, 이 과정에서 강요는 없었다”며 “인건비를 낮추려고 전문직 급여체계를 변경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