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사모님들만 골라 ‘작업 퍼팅’
▲ 영화 <타짜>의 한 장면. |
14년 전 사업실패로 신용불량자가 된 김 씨. 제대로 된 직장을 찾기도 힘든 그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은 동거녀 A 씨를 만나면서부터였다. 김 씨는 A 씨의 명의로 대출을 받아 카페를 함께 운영하며 재기를 꿈꿨다. 이후 한동안 생활의 안정을 찾는 듯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주변에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대거 생겨나면서 카페의 수입이 하향곡선을 그렸기 때문이다. 결국 운영비는커녕 종업원 월급도 주지 못할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타개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던 김 씨는 단골로 이용하던 세탁소 주인을 찾았다.
그는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돈이 좀 필요하다. 한 달 후에 바로 갚겠다”며 조심스레 450만 원을 빌려줄 것을 부탁했다. 몇 년째 김 씨를 봐왔던 세탁소 주인 김 아무개 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빌려줬다. 그러나 한 달 후에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자 그는 오히려 더 큰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변제능력을 의심받지 않기 위해 거짓말도 덧붙였다. 김 씨는 “사실 커피숍은 부업이고 대전에서 유명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현금 2억 원 정도를 융통할 능력이 있는데 지금 별 거 아닌 소송 때문에 자금이 묶여 있다”며 “빨리 해결해 저번에 빌려준 450만 원까지 갚을 테니 1000만 원을 더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석 달 동안 이 같은 방식으로 세탁소 주인 김 씨에게 3750만 원을 빌렸다.
그러나 김 씨는 막상 돈이 생기자 동거녀 A 씨와 운영하던 카페에 이 돈을 투자하지 않았다. 첫 사기행각에서 얻은 수확은 김 씨가 앞으로 벌일 사기행각의 ‘자본금’일 뿐이었다. 쉽게 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사기행각은 보다 더 과감해졌다. 사업을 할 당시 배워뒀던 골프를 무기로 김 씨는 도곡동, 청담동 일대에 있는 골프장과 골프동호회, 온라인 모임 등에 닥치는 대로 가입했다.
이 모임에서 만난 기혼여성 중 재력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뽑아 골프를 빌미로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재력 있는 집 부녀자들은 사기피해를 입어도 체면상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김 씨는 기혼여성들과 함께 야외 필드에 나가거나 사적으로 만나 식사하며 친분을 쌓았다. 그러다 알고 지낸 지 서너 달 가까이 되면 본격적으로 속내를 드러냈다.
김 씨는 “여윳돈을 빌려주면 고액의 이자를 주겠다”고 속여 수천만 원을 편취했다. 여성들은 그의 화려한 입담과 상당한 수준의 골프 실력을 보고 재력가라는 그의 말을 쉽게 믿었다. 더욱이 김 씨는 골프장이나 동호회 모임 등에 나갈 때면 항상 명품옷을 빼입고 비싼 외제차를 타고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고가의 외제차를 반년 간격으로 바꿔 타며 “사업이 잘 풀려서 그렇다”며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땡전 한 푼 없는 데다 신용불량자인 그가 이렇듯 실제 재벌 못지않은 행색을 갖출 수 있었던 배경은 간단했다. 김 씨의 ‘다단계’ 방식의 사기수법 때문이었다. 그는 약속한 이자를 돌려주기 위해 다른 피해자를 만든 후 원금만 빼돌렸다. 예를 들어 B 여성에게 고액의 이자를 빌미로 4640만 원을 빌린 다음엔 만나고 있던 C 여성에게 “다른 사람에게 줄 이자가 있어서 그러니 일단 500만 원만 빌려주면 더 많은 이자를 돌려 주겠다”고 말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급한 이자를 몇 번 변제한 후 더 큰 돈을 요구하고, 또 그에 대한 이자는 또 다른 사기를 쳐 갚았다. 일종의 돌려막기였다.
김 씨의 범행대상은 부유한 기혼여성만이 아니었다. 골프장에서 범행대상을 물색하던 김 씨는 얼마 후 도곡동 소재 골프매장 여종업원에게도 접근했다. 그는 자신이 사채업에 종사한다고 속인 후 매장에 방문하는 재력 있는 여성 손님들의 이름을 대며 다 자신의 고객이라고 감언이설을 했다. 그는 몇 달 동안 이 매장을 방문하며 비싼 명품들을 아무렇지 않게 결제하거나 현금으로 구입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친분이 쌓였다고 느껴지자 그는 “종업원 일을 하면 얼마나 버냐. 일하면서 번 돈을 맡기면 이자를 매달 챙겨 줄 테니 용돈으로 써라”고 속여 두 달 동안 1954만 원을 편취했다. 또 다른 여종업원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2755만 원을 가로챘다.
강남 일대 골프 동호회에서 3년 동안 활동하며 알고 지낸 회원들을 상대로도 사기행각을 벌였다. 사업을 하고 있는 것처럼 넋두리를 늘어놓은 뒤 투자금 명목으로 4억 2000만 원을 편취했다. 심지어 나이트에서 만난 ‘부킹녀’도 사기대상에 포함됐다. 김 씨는 모텔에서 성관계를 한 후 자신이 벌인 사기행각을 자랑하듯 늘어놓으며 “이자만 제 때 주면 원금을 고스란히 내 몫으로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의 입담에 속아 이 여성 역시 목돈을 만질 요량으로 2년 동안 김 씨가 갚아야 할 이자를 대신 갚아주는 바람에 6억 200만 원을 날렸다.
김 씨의 범죄행각은 갈수록 악랄해졌다. 지난 2009년에는 ‘강간협박’까지 저질렀다. 김 씨는 골프장에서 알고 지낸 여성 D 씨를 경기도 소재 골프클럽으로 데려간 후 근처 야산으로 끌고 가 강제로 성폭행했다.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한 그는 성관계 사실을 주변에 알리겠다고 협박해 1800만 원을 편취했다.
이런 방식으로 11명의 여성들이 7년 동안 일주일 또는 한 달 간격으로 수백만에서 수천만 원씩 그에게 빌려줘 피해금액은 총 13억 3000만 원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김 씨의 정체를 의심했으나 김 씨와의 관계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조금만 더 있으면 갚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그의 말을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9월 9일 기자와 만난 서울고등법원 공보판사는 “김 씨는 사기행각으로 번 돈으로 3년 동안 고가의 외제차 7대를 무면허로 운전하는 등 사회질서에 반하는 대담한 범죄 를 벌여왔다. 그러나 피고인이 전과가 없는 점을 감안해 징역 2년 형이 선고됐다”고 말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