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길 접어드니 아스라한 고향풍경
▲ 돌담길이 아름다운 한밤마을. |
한밤마을은 경북 군위군 부계면에 자리한 전통마을이다. 팔공산에서 흘러온 물줄기가 한밤마을의 동쪽과 서쪽 양편에서 지나다가 북쪽에서 만나 남천을 이룬다. 이 마을은 950년경 남양 홍씨에서 갈려 나온 부림 홍씨의 시조 홍란이란 선비가 입향하면서 촌락을 형성했다. 그 무렵 의홍 예씨, 신천 강씨 등도 마을로 들어왔으나 모두 떠나고 현재는 여양 진씨, 전주 이씨, 예천 임씨, 영천 최씨, 고성 이씨 등이 부림 홍씨 일족과 어울려 살고 있다.
마을은 본래 심야(深夜) 또는 대야(大夜)라고 불리던 곳이다. 그러나 1390년경 홍씨 14대손 홍로가 역학적으로 밤 야(夜)자가 마을에 과히 좋지 않다며 대율(大栗)로 고쳐 불렀다. 한밤은 그 대율의 이두 표현법이다.
마을로 찾아가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중앙고속국도 군위IC로 빠져 나온 후 5번 국도와 919번 지방도 등을 이용해 부계면 방향으로 달리다가 908번 지방도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나온다. 908번 지방도는 한밤마을과 제2석굴암, 한티재를 넘어 79번 국도에 합류하는 길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힐 정도로 운치가 있다. 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한걸음에 내달리지 못 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비단 길이 그렇게 생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위로 우거진 숲이 아름다운 데다가, 봄가을을 물들이는 벚꽃과 단풍이 자동차 바퀴를 매어놓는 이유가 더 크다.
한밤마을에 이르자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솔숲이다. 마을 입구에는 140여 그루의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일명 성안숲으로 불리는 이 송림은 지난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전국 10대 마을숲’ 중 하나로 지정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 홍천뢰 장군의 훈련장으로 사용된 송림이다. 숲 속에 장군의 기념비와 진동단, 효자비각 등이 세워져 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3년 동안 잡목제거와 함께 연못과 장군 기념비, 개천 등을 재정비해 완벽한 마을의 쉼터로 다시 태어났다.
숲을 지나자 오른쪽으로 한밤마을로 드는 길이 나타난다. 총연장 4㎞에 달하는 한밤마을의 명물 돌담길이다. 한밤마을은 팔공산이 토해낸 돌들이 만들어낸 곳이다. 물줄기와 함께 마을 앞 하천으로 굴러온 돌들은 차곡차곡 쌓여 담을 이루었다. 비단 하천에만 돌들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밭을 일구기 위해 땅을 파면 거기서도 맨 돌만 나왔는데, 그것도 역시 담이 되었다. 그렇게 수십 수백 년 마을이 제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돌담도 높아지고 또한 길어졌다. 이제 그 돌담길은 마치 제주도를 연상시킬 정도다. 그래서 혹자들은 한밤마을을 ‘육지 속의 제주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돌담길을 따라서 마을로 들어간다. 자동차 한 대가 충분히 지날 만큼 널찍한 길이다. 돌담은 약 1~1.5m 높이로 쌓여 있다. 한밤마을의 돌담이 제주도와 다른 점은 외담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주도는 담을 한 겹으로 쌓았지만, 이곳에서는 마치 성곽처럼 폭을 넓게 잡아서 쌓았다. 어떤 곳은 그 폭이 1m를 훌쩍 넘길 정도다.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워낙 많은 돌들이 나와서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맞다.
돌담길은 마을 중앙의 대청으로 이어진다. 이 대청은 조선 전기에 지어진 것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2호로 지정돼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10년(1632년) 중창됐다. 효종과 숙종 때 고친 적이 있고, 1992년에 완전 해체·복원했다. 본래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동네의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다. 동네 어른들이 이곳에 삼삼오오 모여 화투를 치거나 장기를 두면서 심심함을 달랜다. 여름가을로 대청을 훑고 지나는 바람이 좋아 여행객들이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느라 지친 다리를 이곳에서 풀기도 한다.
대청 옆은 남천고택이다. 상매댁이라고도 불리는데 100년 이상 된 한옥이 20채가 넘는 한밤마을에서도 가장 크고 오래된 집이다. 조선 후기인 1836년 지어진 것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57호로 지정돼 있다. 중문채와 아래채도 있었으나 광복 후 철거되었고, 대문채도 살짝 옮겨졌다. 지금은 사랑채와 안채, 사당이 남아 있다. 현재 이 집은 부림 홍씨 29대 손인 홍석규 씨가 지키고 있다. 이 집의 막내아들로 영남대 병원에서 일을 하다가 올 2월 명예퇴직을 하고 활발히 한밤마을을 보전하는 데 힘쓰는 이다. 한밤마을에는 부림 홍씨 종택도 있는데, 이 집은 그리 역사가 길지 못 하다. 제2석굴암 부근에 종택이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어 한밤마을로 옮겨왔다. 현재 10대째가 살고 있다.
▲ 한밤마을 초입에는 오래된 솔숲이 있다. |
한밤마을의 돌담길은 두 유형으로 분리된다. 좁은 길과 넓은 길. 사실 대부분이 좁은 길이었다. 넓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60~70년대 새마을운동의 열풍이 불면서 많은 길이 ‘초가지붕 없애고, 마을길도 넓힐 때’ 변화의 바람을 따랐다. 물지게를 지고 가면 서로가 피해주어야 지나가던 길인데, 이제는 거뜬히 차량이 통행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옛담 그대로가 남아 있는 구석구석이 있다. 정비를 하지 않았으니 담도 삐뚤빼뚤 쌓였고, 폭도 좁다. 하지만 거기에는 세월의 흔적과 무게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푸른 이끼가 돌담을 덮고 있다. 호박덩굴이 그 담을 자연스럽게 타고 넘는다. 애써 가꾸지 않아도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마음을 푸근하게 만드는 그런 길이다.
한편, 한밤마을 근처에는 반드시 둘러볼 곳이 하나 있다. 제2석굴암이다. 한밤마을에서 대구 방면으로 약 5분 거리에 있다. 경주의 석굴암보다 1세기 전에 조성된 작은 석굴암으로 이곳에는 석불 3구가 안장돼 있다. 군위삼존석불로 불리는 이 불상들은 국보 제109호로 지정될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제2석굴암 앞마당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1호인 모전석탑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8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다. 제2석굴암 주변은 풍광도 아주 뛰어난데, 특히 송림이 한밤마을 못지않게 좋다.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
여행안내
▲길잡이: 중앙고속국도 군위IC→5번 국도→효령삼거리→919번 지방도→부계삼거리→908번 지방도→한밤마을→제2석굴암 ▲먹거리: 한밤마을에서 약 1.5㎞ 떨어진 제2석굴암 주변에 매기매운탕과 한방오리 등의 요리를 잘 하는 산너머남촌(054-383-5445), 꿩샤브샤브가 일품인 원두막식당(054-383-8227)이 있다. 이 두 식당은 2008년 경상북도가 꼽은 으뜸음식점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곳이다. ▲잠자리: 문의: 한밤마을 내에 남천고택의 쌍백당 등 전통한옥을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있는 곳들이 더러 있다. 한옥펜션도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한밤마을 운영위원회(054-383-0061)로 연락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