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형규 주저앉힌 ‘삼각협공’ 있었다
▲ 이재오 장관(왼쪽)과 이상득 의원. |
지난 8월 29일 김태호 전 경남도지사가 총리 후보직에서 사의를 표명한 이후 청와대는 고민에 빠졌다. 국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후보자를 임명해야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천명한 ‘공정 사회’에 걸맞은 인물을 찾기 위해선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 이러한 딜레마 속에 여권 핵심부에선 김황식 감사원장과 맹형규 장관이 강력한 총리 후보로 떠올랐다. 9월 초 임태희 실장은 “인사추천 및 검증을 대폭 개선해 원점에서 진행했고, 도덕성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았다”고 밝힌 바 있는데 여기에 해당됐던 이들이 김 원장과 맹 장관이었다고 한다. 청와대 정무라인의 한 관계자는 “시간이 없었다. 김 원장과 맹 장관은 청문회를 통과한 경력이 있을 뿐 아니라 이 대통령의 신뢰도 두터워 적임자로 평가를 받았다. 둘에 대한 집중적인 스크린이 이뤄졌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맹 장관보다는 김 원장 쪽으로 무게가 쏠리기 시작했다. 친이계인 맹 장관이 청문회에서 야당은 물론 친박계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여권 일각에서 제기됐기 때문이다. 김 원장의 경우 대법관(2005년) 감사원장(2008년) 임명 당시 두 번의 청문회를 치르며 도덕성과 청렴성이 입증됐고, 호남(전남 장성) 출신이라는 점에서 지역 안배 효과도 거둘 수 있다는 점이 부각됐다고 한다. 청와대 내에선 “민주당이 여당 시절 대법관으로 임명한 김 원장을 지금 와서 부적격자로 몰아세우진 않을 것”이란 기대도 나왔었다는 후문이다. 특히 이 대통령과 ‘형님’ 이상득 의원이 감사원장으로서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김 원장의 총리실 입성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김 원장 내정설이 확산되며 끝난 것처럼 보였던 총리 인선 작업은 의외의 상황을 맞았다. 김 원장 본인이 총리직을 고사했던 것. 당시 임태희 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인사들이 김 원장 설득에 나섰지만 실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정무라인 관계자는 “김 원장도 나름대로의 채널을 통해 여론을 수렴했는데 정치권에서 자신과 관련된 새로운 의혹들이 불거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부담스러워했다. 특히 2008년 청문회에서도 문제가 됐던 병역 면제가 또 다시 도마에 오를 것을 우려하며 거절했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소장파와 몇몇 최고위원들은 김 원장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들을 청와대 측에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수도권의 한 소장파 의원은 “군 면제 정권이라는 국민들의 지적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김 원장도 청문회를 통과하기 힘들 것이란 의견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 김황식 총리 내정자 |
소장파와 이 장관의 협공으로 김 원장의 총리 내정이 좌절될 가능성이 커지자 ‘형님’ 이 의원이 ‘해결사’로 나섰다. 이 의원은 이 대통령에게 ‘김 원장 카드’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통령이 총리직 수락을 주저하던 김 원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삼고초려’한 것 역시 이 의원 입김이 작용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김 원장의 병역 면제에 큰 하자가 없다는 이 의원과 임태희 실장의 보고를 듣고 난 후 적극적으로 김 원장 구애에 나섰다. 대선캠프 때부터 이 의원 측근으로 분류되고 있는 한 청와대 관계자는 “이재오 장관이 미는 인사가 총리가 될 경우 그의 권한이 너무 비대해질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총리 위 장관’이라는 비난을 받느니 차라리 명망 있고 검증된 김 원장이 낫다는 입장을 이 대통령이 수용한 것이다. 애초에 이 대통령은 정치인 총리는 생각지도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 의원 측은 김 원장의 총리 임명을 성사시키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선 ‘경쟁자’였던 맹 장관과 관련된 파일들을 대거 확보, 청와대에 건넸다. 이를 근거로 ‘맹 장관의 청문회 통과가 힘들 것’이란 의견도 제시했다고 한다. 소장파 쪽에서 김 원장 비리 의혹을 캐는 것에 대해 ‘맞불’을 놓은 것이다. 정권 출범 이후 항상 권력 핵심에 위치해 있던 형님 세력의 정보가 그렇지 못한 소장파보다는 우위에 있다는 게 정설인 상황에서 양측의 대결은 예상대로 이 의원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주요 공직자들의 인사 스크린을 담당하는 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김 원장이나 맹 장관 모두 일찌감치 총리 후보에 포함돼 있어 광범위하게 자료들을 수집했다”면서 “이것들을 정치권에서 끊임없이 요구했는데 결국은 힘이 센 쪽에서 더 많이 가져가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했다.
또한 이 의원은 더 이상의 국정 혼란을 막기 위해선 차기 총리 후보자가 반드시 청문회를 통과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 정무적인 전략도 펼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맹 장관의 경우 야당은 물론 여당 내에서도 ‘반대 표’가 나올 수 있지만 김 원장은 여야를 막론하고 신망이 두텁기 때문에 무난하게 청문회를 넘길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이 의원 측은 현 정권 들어 대표적인 ‘저격수’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박지원 대표에게 ‘협조’를 요청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의원의 ‘정치적 양아들’로 불리는 임태희 실장이 박 대표에게 김 원장에 대한 찬반 의사를 구했고, 박 대표로부터 ‘OK 사인’을 받았다는 게 골자다. 그동안 박 대표의 송곳 같은 질의에 당혹해했던 여권 핵심부 내에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 박 대표는 김 총리 후보자 내정이 공개되기 전 “김태호 전 지사가 낙마한 직후부터 여권과 후임 후보자에 대해 협의를 해왔다. 최근에는 김 원장과 맹 장관을 포함해 3명의 이름을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지금 민주당에서 김 원장과 관련된 의혹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지만 여권 내부에서 청문회 통과를 여전히 낙관하는 분위기가 우세한 것도 이러한 박 대표의 스탠스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일각에서는 민주당의 거친 공세가 국민들 시선을 의식한 ‘립 서비스’라는 의혹마저 일고 있다. 그동안 정치권에서 호남 출신인 김 원장에 대해 민주당이 ‘살살 다룰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지금은 조금 분위기가 달라지긴 했지만 김 원장에 대해 대체로 우호적인 것은 맞다. 최초의 호남 총리라는 상징성도 있고 또 참여정부에서 대법관까지 지낸 인물인데 통과시켜주는 게 맞는 것 같다. 박 대표도 그러한 점들을 감안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 측은 ‘차기 영순위’ 박근혜 전 대표에게도 협조를 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엔 친박과 의사소통이 원활한 정진석 청와대 정무수석이 관여했다. 박 전 대표 역시 이재오 장관과 가까운 맹 장관보다는 김 원장의 손을 들어줬다는 전언이다. 친박계의 한 의원 보좌관은 “이상득 의원이 김 원장을 내세우려 한다는 소문은 정치권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였다. 결국 임기 마지막까지 권력을 독점하겠다는 것 아니겠느냐”면서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박 전 대표는 김 원장이 호남이라는 점을 높이 산 것으로 안다. (박 전 대표의) 호남 끌어안기 일환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고 전했다. 외연확대를 모색하고 있는 박 전 대표와 김 원장의 총리 발탁으로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이 의원의 공감대가 맞아떨어졌다는 얘기다.
김 원장과 맹 장관을 놓고 마지막까지 고심하던 이 대통령이 결심을 굳히게 되기까지엔 박 대표와 박 전 대표 측의 이러한 의견들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윤호석 정치연구소의 윤호석 소장은 “이번 총리 인선을 둘러싼 여권 내 힘싸움을 지켜보면 역시 이 의원 힘이 막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서 “청문회 통과를 노심초사하고 있는 이 대통령 심중을 읽어내는 이 의원의 수읽기가 탁월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