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사업 적자에 배터리 투자로 재무 부담…배터리 사업 빠른 확장에 ‘미래 성장성’ 높은 평가도
올해 들어서자마자 국내외 신용평가사들은 SK이노베이션의 신용등급을 일제히 강등했다. 한국신용평가와 나이스신용평가는 SK이노베이션의 회사채 신용등급과 전망을 각각 ‘AA+, 부정적’에서 ‘AA0, 안정적’으로 내렸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도 SK이노베이션과 SK종합화학의 신용등급을 기존 ‘Baa2’에서 ‘Baa3’으로 최근 하향 조정했다. 무디스의 10개 투자적격등급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다. 등급 전망도 ‘부정적’을 그대로 유지했다. 지난해 말 스탠더드앤푸어스(S&P)도 ‘BBB’에서 ‘BBB-’로, 투자등급의 최하단으로 강등했다. 신용등급 하락은 자금 조달 금리를 높여 회사 재무 부담을 높인다.
그런데 같은 시기 채권시장에선 정반대 상황이 연출됐다.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이 3000억 원 규모 회사채 발행을 위해 진행한 수요예측에서 발행 물량보다 7배 많은 2조 1700억 원의 매수 주문이 접수됐다. SK이노베이션은 수요예측 흥행에 성공하면서 회사채 발행 규모를 5000억 원으로 늘리기로 했다. 주가도 고공행진 중이다. SK이노베이션의 올해 주가 상승률은 지난 1월 28일 기준 약 45%, 지난 8개월간의 상승률은 무려 478%에 달한다.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전경. 사진=일요신문DB
시장 시선이 극명하게 엇갈린 이유는 SK이노베이션이 과도기를 겪고 있어서다. 신용평가사들은 SK이노베이션의 본업인 정유업이 부진을 겪고 있는 가운데, 배터리 부문의 대규모 투자 등으로 재무 부담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 SK이노베이션은 1월 29일 지난해 2조 5688억 원의 영업손실을 냈다고 밝혔다. 주력인 석유사업에서만 2조 2228억 원의 적자를 냈다. 지난해 4분기 실적은 매출 7조 6776억 원, 영업손실 2434억 원을 기록했는데, 직전 3분기와 비교하면 적자 규모가 4.5배 커졌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당초 예상치보다 손실 규모가 크다”고 평가했다.
코로나19의 빠른 확산세에 직격탄을 맞았다. 전 세계가 문을 걸어 잠그면서 수익 통로가 막혀버렸다. 고부가가치 석유제품이자, SK이노베이션 실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제품군 가운데 하나인 항공유부터 휘발유, 경유 등의 판매량이 급감했다. 대표적인 수익 지표인 정제마진(석유제품 가격에서 원료비를 뺀 가격)은 1년 내내 마이너스(-)를 기록했는데, SK이노베이션은 손해를 보며 제품을 팔면서도 상황을 지켜보는 것 외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실적 부담이 높은 상황에서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 부문에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배터리 부문은 SK이노베이션이 친환경 중심 기업으로 전환하기 위해 선택한 핵심 사업이다. 지난해 미국과 헝가리 등 전기차 배터리 공장 증설을 위해 약 4조 원을 투입한 것으로 파악된다. 대규모 투자로 지난해 배터리 사업 매출은 사상 처음으로 1조 원을 돌파했지만, 해외 공장 초기 비용 영향으로 4265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올해도 배터리 분리막 사업을 중심으로 연간 기준 4조~4조 5000억 원의 투자가 예정돼 있다.
수익성이 악화된 상황에서 대규모 투자 기조를 유지하면서 재무 부담은 크게 늘어나고 있다. 2015년 4조 857억 원이었던 SK이노베이션의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2019년 1조 8258억 원, 지난해 3분기에는 41억 원으로 주저앉았다. 연결기준 부채비율은 2014년부터 100%를 넘긴 적이 없었지만, 2019년 말 117%로 높아지면서 이 기록을 깼다. 2020년 9월 말 기준 부채비율은 150%다. 순차입금은 11조 6000억 원으로, 현금 및 현금성 자산 3조 5947억 원보다 3배 이상 많다.
한 투자은행 업계 관계자는 “신용평가사들의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을 유지하는 것은 추가 등급 하락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뜻”이라며 “배터리 부문에서 흑자가 나올 때까지 외부에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인데, 신용등급 하락은 자금 조달 금리를 높인다. 수익성 악화와 그에 따른 재무 부담이 커지는 악순환을 지적받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주식과 채권 시장에선 SK이노베이션의 미래 성장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LG화학과 삼성SDI에 비하면 국내 배터리 후발주자지만 최근 현대·기아차, 폴크스바겐, 포드 등 주요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에 전기차용 배터리를 공급하며 빠르게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2차전지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2019년 2월 처음으로 전기차 배터리 출하량 순위에서 10위권에 입성한 뒤, 2년이 채 안 된 지난해 11월 5위로 수직 상승했다.
SK이노베이션은 생산능력 확충에 속도를 낼 방침이다. 2017년 1.7GWh였던 2차전지 생산능력을 지난해 말 약 40GWh까지 늘렸다. 매년 50kW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 80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2023년까지 연 85GWh, 2025년까지 125GWh 이상의 글로벌 배터리 생산능력을 갖추는 것이 목표다. SK이노베이션은 당초 2025년 세계 전기차 시장 3위 진입을 목표로 세웠는데, 최근 증권가에선 투자 규모가 크고 이에 따른 사업 확대 속도를 고려하면 예상보다 목표 달성을 앞당길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올해 신규 사업뿐만 아니라 기존 사업에서도 친환경 중심의 전면적이고 근본적 혁신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 울산 콤플렉스가 있는 석유화학공단. 사진=연합뉴스
SK IET와 SK루브리컨츠 등 자회사들을 통해 SK이노베이션이 숨통을 다소 틔울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SK IET는 전기차 배터리의 성능과 안정성을 결정짓는 핵심 소재인 리튬이온 배터리 분리막(LiBS)을 주로 생산하는 회사로, 올해 상장을 추진 중이다. 기업가치는 6조 원가량으로 추산된다. 이 경우 SK이노베이션이 공모를 통해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은 1조 원이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소수 지분 매각을 추진 중인 SK루브리컨츠를 통해서도 SK이노베이션이 조 원대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다만 SK이노베이션이 재무 부담을 빠르게 털어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SK이노베이션의 매출은 석유, 화학 부문에서 80%가량이 나온다. 정유업황은 지난해 말부터 점차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수요가 얼마나 회복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배터리 사업은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직 5%가 채 되지 않는다. SK이노베이션은 올해 손실 규모를 줄이고 2022년 흑자 전환을 예상하고 있으나 매출 예상치는 5조 원대 중반이다. 경쟁사인 LG에너지솔루션(22조 원), 삼성SDI(14조 원)와 비교하면 갈 길이 멀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배터리 사업이 빠르게 확장하고 있고, 전환 작업도 성공적으로 평가 받고 있지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며 “일단 올해 석유화학부문 회복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LG에너지솔루션과 진행 중인 배터리 관련 소송도 걸림돌이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최종 판결 시점은 오는 2월 10일로 전망된다. 소송 비용만 수천억 원이고, 패소할 경우 미국으로 배터리 제품 수입이 금지돼 배터리 공장 가동이 불투명해질 수 있다. 손해배상 또는 합의금 등의 경우 수조 원이 거론되고 있다.
배터리 소송전과 관련해 SK이노베이션 배터리기획실장은 1월 29일 ‘2020년 4분기 및 연간 실적 설명회 컨퍼런스콜’에서 “현재 소송 관련 비용은 배터리 사업 영업손실로 100% 반영하고 있다”며 “배터리 사업 손실이 순수한 사업 손실에 비해 과대하지만 소송 이슈가 해소되면 영업이익이 큰 폭으로 개선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실제 소송비용이 제외됐다면 지난해 상각전영업이익(EBITA) 기준 손익분기점(BEP)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 됐을 것이다. 소송을 원만하게 종결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