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대표+정현호·최윤호 사장 일종의 집단경영…신사업 추진·대형 M&A 진행은 쉽지 않아
지난 1월 18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삼성은 2008년에도 계열사 독립경영 체제로 그룹을 운영한 바 있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삼성 특검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컨트롤타워였던 전략기획실도 해체했기 때문이다. 당시 삼성은 임직원 차명계좌를 이용해 불법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혐의로 특검 수사를 받았으며 이건희 회장은 조세포탈 혐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건희 회장 사퇴 후 삼성은 사장단회의를 사장단협의회로 격상하고, 산하에 투자조정위원회와 브랜드관리위원회를 신설해 계열사 간 업무를 조율했다. 이수빈 당시 삼성생명 회장(현 삼성경제연구소 회장)이 사장단협의회를 주재하면서 삼성그룹 전반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수빈 회장은 대외적으로도 삼성그룹을 대표해 정재계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2008년 이수빈 회장이 있었다면 현재는 정현호 삼성전자 사업지원 TF장(사장)이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정 사장은 1995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MBA 석사 과정을 수료하면서 당시 하버드대 유학 중이던 이재용 부회장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 사장은 2011년 미래전략실에 합류해 경영진단팀장, 인사지원팀장 등을 역임했으며 2017년부터 사업지원 TF장을 맡고 있다.
그렇지만 사업지원 TF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작지 않아 현재에 비해 역할을 확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사업지원 TF는 각종 비리에 연루됐던 미래전략실의 후신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사업지원 TF는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사건에도 연루됐고, 이와 관련해 김 아무개 사업지원 TF 부사장이 1년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또 정현호 사장이 이수빈 회장처럼 삼성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것도 아니기에 무게감도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올해 삼성전자를 대표해 신년사를 발표한 사람은 정 사장이 아닌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이었다.
이창민 경제개혁연구소 부소장은 2020년 12월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이재용 파기환송심 양형 반영, 무엇이 문제인가?’ 좌담회에서 “재벌 내 위법행위의 기획과 실행은 대부분 미래전략실 같은 조직에서 수행한다”며 “사업지원 TF는 미래전략실의 새로운 버전으로 알려졌는데 이에 대해 삼성 준법감시위원회가 아무런 조사 및 점검을 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각 계열사가 안정적인 경영만 추구한다면 그룹 전체를 이끌 총수나 컨트롤타워가 꼭 필요한 건 아니다. 하지만 총수의 승인 없이 신사업 추진이나 대형 인수합병(M&A)을 진행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 구속 전인 2016년 11월 미국 전장회사 하만을 인수한 이후 현재까지 대형 M&A를 진행하지 않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총수 부재 시 공격적인 투자나 M&A에 나서기 쉽지 않다”며 “총수 없이 실적이 상승한 기업도 있지만 당장은 큰 영향이 없더라도 장기적으로 여러 기회를 놓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런데 지난 1월 28일, 최윤호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 사장은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기존 산업에서 시장 주도적 입지를 확고히 함과 동시에 신규 사업에서도 지속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강화하고자 한다”며 “이를 위해 보유하고 있는 재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전략적 시설투자 확대와 M&A를 추진하겠다”고 전했다.
총수의 승인 없이 M&A가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윤호 사장이 이재용 부회장의 의사를 어느 정도 대변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 부회장도 지난 1월 옥중 메시지를 통해 “처한 상황과 관계없이 삼성은 가야 할 길을 계속 가야 한다”며 “투자와 고용 창출이라는 기업의 본분에도 충실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삼성전자 관계자는 “M&A를 추진한다는 것이 당장의 일은 아닐 것 같다”고 직접적인 답변을 피했다.
최윤호 사장은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삼성전자의 재무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고 있다. 앞서 지난 1월 26일 최 사장은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최고경영진 간담회에 삼성전자 대표 자격으로 참석해 대외적인 보폭도 넓히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에서 대표이사 외에 사내이사로 등재된 인물은 한종희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사장과 최윤호 사장뿐이다.
현 상황을 종합하면 삼성전자는 일종의 집단경영 체제를 구성했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사 서초사옥 앞. 사진=일요신문DB
현 상황을 종합하면 삼성전자는 김기남 부회장이 DS(반도체) 부문을 맡고, 김현석 삼성전자 사장과 고동진 삼성전자 사장이 각각 CE(가전) 부문과 IM(IT·모바일) 부문을 담당한다. 여기에 최윤호 사장이 삼성전자의 전반적인 경영관리를 수행하고, 계열사 간 조율 업무는 정현호 사장이 맡으면서 일종의 집단경영 체제를 구성했다.
삼성전자 외에 다른 계열사들도 CEO(최고경영자)를 중심으로 독립경영이 이뤄지고 있다. 계열사 간 사업 조율은 건설 계열사의 경우 김명수 삼성물산 EPC경쟁력강화 TF장(사장)이 맡고, 금융 계열사는 박종문 삼성생명 금융경쟁력제고 TF장(부사장)이 맡는다. 삼성의 대형 M&A는 대부분 삼성전자가 진행하기에 총수 부재로 인한 영향은 상대적으로 덜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룹을 총괄하는 의사결정에 대해서는 아직도 역할이 뚜렷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경우 3명의 대표이사가 각 사업 부문을 맡고, 최윤호 사장과 정현호 사장이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게 맞다”면서도 “(삼성그룹 총괄 의사결정과 관련해서는) 어떻게 진행하는지 내용을 알지 못한다”고 전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