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의 기업’ 파면 팔수록 구린내 진동
▲ 이선애 상무(왼쪽)와 이호진 회장. 사진제공=헤럴드미디어 |
# 편법증여 원인 집안에?
지난 10월 13일 검찰의 태광산업 본사 압수수색 빌미를 제공한 것은 그동안 재계 안팎에서 여러 차례 거론됐던 이호진 회장의 편법 증여 논란이다. 이 회장이 태광 계열사들의 자산을 아들 현준 군이 2대주주로 있는 비상장 계열사들로 몰아줬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 지난 2006년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현준 군은 계열사 티시스의 제3자배정방식 유상증자에 참여해 신주 전량을 인수하면서 지분 49%를 확보했고 같은 해 계열사 티알엠 유상증자에도 참여해 지분율 49%의 대주주가 됐다.
현준 군은 태광 계열의 한국도서보급 지분 49% 또한 보유하고 있다. 현준 군이 2대주주로 있는 이 회사들의 최대주주는 지분 51%를 보유한 이호진 회장이다. 이후 이 회장은 현준 군이 대주주로 있는 회사들에 태광산업 대한화섬 등 주력 계열사들의 주식을 대거 팔아넘기면서 향후 현준 군이 그룹의 순환출자 중심에 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재계 일각에선 현재 16세인 현준 군으로의 지분 승계 작업이 편법 논란을 부를 정도로 급속도로 이뤄진 배경을 이 회장과 어머니 이선애 태광산업 상무 간의 갈등설에서 찾고 있다. 올해 82세인 이선애 상무는 태광 내에서 이 회장 이상 가는 막후 실력자로 거론될 정도로 이른바 ‘왕상무’로 통하고 있다. 그런데 태광 사정에 밝은 외부 인사들 사이에선 이선애 상무가 이호진 회장보다 장손자인 이원준 씨(32)에게 더 애정을 쏟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이원준 씨는 고 이임용 창업주의 장남인 고 이식진 부회장의 아들로 현재 태광산업(지분율 7.49%)과 흥국생명(지분율 14.65%) 등 유력 계열사의 2대주주에 올라 있다.
고 이식진 부회장은 지난 1996년 이임용 창업주 사망 이후 외삼촌인 이기화 전 회장과 함께 경영을 이끌었지만 2003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임용 창업주의 차남 이영진 씨도 일찍 사망하면서 경영권은 삼남인 이호진 회장 몫이 됐다.
지난 2004년 이 회장이 태광그룹 회장에 취임할 당시 이 회장의 태광산업 지분율은 15.14%로, 이는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당시 고 이식진 부회장으로부터 지분 전량을 상속받은 이원준 씨 지분율은 15.57%로 이 회장보다 높았다. 그런데 이 회장 취임 직후 이원준 씨는 장내매도를 통해 지분율을 11.08%로 줄였다. 상속세 납부나 혹은 회장직을 승계한 이호진 회장을 최대주주로 올려주기 위한 조치로 풀이됐다.
이후로 태광그룹은 이호진 회장 중심 체제로 재편됐지만 태광가가 유교적 가풍이 강했던 까닭에 미국에서 유학 중인 이원준 씨와 차기 경영권을 연결 짓는 관측들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그룹 내에서 영향력이 강한 이선애 상무 세력을 중심으로 장자승계 원칙이 대두될 경우 이원준 씨가 자연스레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이호진 회장이 지난 2006년 초등학생 아들 현준 군에게 서둘러 지분을 넘겨주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현재 현준 군이 2대주주인 비상장 계열사 티알엠과 티시스는 지난 2008년부터 태광산업 지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티알엠과 티시스는 현재 태광산업 지분을 각각 4.63%, 4.51%씩 보유하고 있다. 현준 군에겐 태광산업 지분이 전혀 없지만 자신이 지분 49%를 보유한 티알엠과 티시스를 통해 태광산업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발판이 마련된 상태다. 현재 태광산업 최대주주인 이호진 회장은 아들 현준 군의 지분율 확대, 그리고 장인 신선호 일본 산사스 회장(지분율 0.24%) 등의 후원을 받아 경영권 안정에 주력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은 이호진-현준 부자 승계 체제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이호진 회장의 잠재적 반대 세력으로 분류돼온 친인척들이 보유한 태광산업 지분율을 무시할 수 없는 까닭에서다.
11.08%였던 원준 씨의 태광산업 지분율은 지난해 3월, 4만 주 장내매도를 통해 7.49%로 하락했다. 그런데 원준 씨가 매각한 4만 주는 사촌동생인 동준 씨(21)와 태준 군(17)이 각각 사들였다. 이들 몫의 태광산업 지분율은 각각 1.80%가 된 상태. 이선애 상무의 지분율이 0.12%, 이 상무가 이사장으로 있는 학교법인 일주학원의 지분율도 5%에 이른다. 이 회장 외삼촌인 이기화 전 회장의 태광산업 지분율도 0.94%다.
과거 검찰의 대기업 수사에서 부모와 자식이 모두 사법처리 선상에 올랐을 경우 검찰은 그중 한 사람만을 처벌하는 관례를 적용해 왔다. 지난 2006년 현대차 비자금 사태 당시 정몽구 회장 아들 정의선 부회장이 구속될 것이란 당초 예상을 깨고 정 회장이 구속수감 됐던 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전례들과 달리 이번 태광 사태 배경엔 모자간 갈등도 섞여 있는 것으로 알려지는 만큼 이호진 회장이나 이선애 상무 중 한 사람이 모든 걸 뒤집어쓰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번 수사를 통해 이호진 회장과 이선애 상무 중 어느 세력이 더 크게 다치느냐에 따라 향후 태광그룹 주도권 경쟁의 향배도 갈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의 비자금 의혹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이 지난 21일 이 회장의 모친인 이선애 태광산업 상무의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태광 관련 의혹이 갈수록 커지는 배경엔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제보자들의 힘이 큰 것으로 보인다. 서울서부지검이 태광산업의 서울 장충동 본사 및 계열사 두 곳을 압수수색했던 지난 10월 13일 박윤배 서울인베스트 대표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태광산업이 계열사들의 신주를 저가로 발행, 아들 현준 군에게 제3자배정 인수방식으로 계열사 지분 절반을 넘겼고 태광산업은 계열사인 흥국화재 지분을 흥국생명에 넘기거나 계열사인 동림관광개발이 골프장을 짓기 전에 회원권을 매수하는 방법으로 계열사 자산을 빼돌린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박윤배 대표는 한때 태광 업무에 깊이 개입했던 인물이다. 박 대표는 지난 2001년부터 2004년까지 3년간 태광과 노무관계 컨설팅 계약을 맺고 자문 역할을 해줬다. 그런데 지난 2005년 태광이 박 대표와 재계약을 하지 않는 과정에서 양측의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태광 측은 최근 “박윤배 서울인베스트 대표가 검찰에 그룹 비리 의혹을 제보하기 전에 27억 원을 요구했다”고 밝힌 상태다. 이에 대해 박 대표는 “돈을 요구한 적이 없다”고 맞서면서 박 대표의 제보 배경에 대한 진실게임 또한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한편 검찰은 이임용 창업주가 1996년 사망한 뒤 자녀들이 재산을 상속받는 과정에서 차명으로 관리되던 주식 일부가 공식 상속재산 목록에서 누락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일부가 태광산업의 자사주로 매입됐고 나머지가 태광 전·현직 임원들의 차명계좌로 관리됐다는 의혹 규명에 검찰이 주력하고 있다.
이 같은 수사는 태광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전직 임원의 구체적인 제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게 검찰 주변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지난 10월 13일 검찰의 일사불란한 압수수색을 지켜본 태광 직원들 사이에선 “검찰 수사관들이 마치 태광 사옥 내부 지도를 머릿속에 그려 넣고 나온 것 같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태광이 케이블TV업체 큐릭스와 쌍용화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정·관계 로비 의혹을 벌였을 가능성이 또 다시 대두된 점 또한 내부 제보자의 존재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지난해 태광의 큐릭스 지분 인수와 관련해 민주당 최문순 의원이 ‘태광이 방송법 개정시 큐릭스 지분을 직접 인수한다’는 군인공제회 이사회 문건을 공개했지만 검찰 수사 결과 유야무야됐다.
지난 2006년 태광의 쌍용화재 인수 당시 금융당국을 상대로 한 로비설이 나돌았지만 결국 인수 허가 결정이 났다. 큐릭스나 쌍용화재 M&A(인수·합병) 관련 로비설은 정부 당국의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 있는 내용들이다. 이처럼 민감한 사안을 검찰이 다시 파헤치겠다고 나선 것은 태광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제보자의 협조 없인 어려운 일로 여겨진다.
제보자와 관련해 재계 일각에선 지난 2004년 이 회장 외삼촌인 이기화 전 회장의 사퇴와 맏형인 이식진 부회장의 사망으로 이호진 회장이 태광산업 총수직을 승계한 이후로 축출된 인사들을 주목하고 있다. 그룹 재무 사정에 깊이 개입한 인물들 중 일부가 새로운 총수 체제하에서 이호진 회장 세력의 눈에 들지 못해 옷을 벗는 과정에서 이 회장과 앙금이 쌓인 것이 지금의 화를 불렀다는 관측에 따른 것이다.
이호진 회장의 어머니 이선애 상무를 따르는 세력과의 힘겨루기 속에서 이 회장이 우군세력 관리에 허점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검찰 주변에선 “그룹 총수가 비자금 관리를 위해 최측근들 위주로 차명계좌를 만드는 게 일반적인데 태광에선 명의를 도용당한 임직원의 수가 너무 많다”는 말도 있다. 결국 이들의 반발이 쌓여 검찰에 결정적 제보가 전달됐을 가능성이 힘을 받고 있다.
태광 계열의 흥국생명 해직 노동조합원들로 구성된 해직자복직투쟁위원회도 지난 10월 20일 ‘이 회장이 차명 보험계좌로 800억여 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검찰에 제출했다. 그밖에 태광산업 지분 4.25%와 대한화섬 지분 9.1%를 보유하고 있는 ‘장하성 펀드’는 지난 10월 19일 “이 회장 등 태광산업 이사들이 업무를 소홀히 해 회사에 피해를 끼쳤다”며 주주대표소송을 내기로 한 상태다. 태광 사정에 밝은 세력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이호진 회장 때리기에 나서고 있는 셈이다.
# 방송업계 판도 뒤바뀌나
검찰의 태광 수사 범위는 편법 증여와 비자금 조성 의혹과 더불어 정·관계 로비 의혹까지 뻗어 있다. 검찰은 태광의 케이블TV 업체 큐릭스 인수 과정에 대규모 로비가 있었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 2006년 태광은 12월 군인공제회와 화인파트너스로부터 큐릭스홀딩스 지분을 넘겨받는 옵션계약을 맺었다. 당시 방송법상 태광이 큐릭스를 인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년 내 방송법이 개정될 것으로 확신한 태광이 큐릭스 지분 인수를 추진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2008년 12월 방송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이듬해인 2009년 1월 태광은 큐릭스홀딩스 지분 70%를 공식 인수하게 된다.
큐릭스 관련 의혹은 지난해 벌어졌던 태광의 ‘성접대 사건’에 대한 재조명을 불렀다. 지난해 3월 태광 계열사 티브로드의 문 아무개 팀장이 서울 신촌의 룸살롱에서 청와대 행정관과 방송통신위원회 간부에게 성접대를 하다 경찰에 적발된 바 있다. 당시는 태광의 큐릭스 지분 인수 직후로, 큐릭스 인수 합병에 대한 당국의 승인을 받기 직전이었다. 이런 까닭에 이 사건은 큐릭스 인수에 대한 로비 일환으로 비치기도 했지만 방통위는 결국 “로비로 보기 어렵다”며 태광의 큐릭스 인수 합병을 허가했다.
그러나 최근 수사를 통해 태광이 청와대 방통위 등을 상대로 조직적인 인맥관리를 해왔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지난해 성접대 사건에 대한 재조사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만약 태광의 큐릭스 인수 과정에 정·관계 로비가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날 경우 방통위의 인수 허가 판정에 대한 논란도 불거질 수 있다. 태광의 독주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봐온 케이블TV업계에선 최악의 경우 태광이 큐릭스를 ‘토해낼’ 가능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연내 추진될 것으로 보이는 종합편성채널(종편) 사업자 선정에 이번 태광 수사가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거론된다. <미디어오늘>은 최근 ‘종편 컨소시엄 구성 등에서 경쟁 신문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평판이 나돌고 있는 <조선일보>가 방통위 등을 겨냥해 이를 집중 보도한 것 아니냐는 시각이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10월 15일 <조선일보>가 검찰 소식통을 인용해 ‘태광 비자금이 SO(System Operator·종합유선방송사업자) 사업 확장을 위해 정·관계 로비 자금으로 사용됐다’는 내용을 대서특필한 배경에 대한 해석이다. <미디어오늘>은 ‘<조선일보>가 이 같은 의도설을 일축했다’고 덧붙였다.
검찰은 태광 본사와 이호진 회장 자택 압수수색을 통해 태광의 M&A에 연루된 100여 명의 정·관계 인사 리스트를 확보했는데 여기엔 전·현직 방통위 관계자도 다수 포함돼 있다고 한다. 방송채널을 가진 기업과 방통위 인사들 간의 부적절한 관계 규명 여부에 따라 종편 사업자 선정의 공정성 또한 도마 위에 오를 수 있는 셈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