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 선처 없는 무관용 원칙 속 ‘억울한 희생자’ 만드는 부작용도 경계
스포츠계를 강타한 학교폭력 파문이 프로야구에도 번졌다. 고척 스카이돔 경기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박정훈 기자
#프로배구가 일깨운 학폭과 체벌의 심각성
‘학폭’은 최근 체육계에서 가장 민감하고 뜨거운 이슈다. 여자 프로배구 이재영과 이다영(이상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쌍둥이 자매가 사태의 도화선이었다. 이다영은 지난해 말부터 인스타그램에 팀 내 스타 선배를 겨냥한 듯한 비난 메시지를 수차례 올렸다. 그 행동이 결국 자신에게 부메랑이 돼 돌아올 줄은 몰랐던 듯하다.
과거 쌍둥이 자매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피해자들이 참지 못하고 폭로 글을 게시했다. “남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봤으면 좋겠다”는 의미였다. 자매는 폭로 내용을 시인하고 자필 사과문을 통해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늦었지만 후회하고 반성한다”는 메시지로 끝내기에는 가해 내용의 수위가 너무 높았다. 무기한 출전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고, 앞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
다음은 남자 프로배구 차례였다. 송명근과 심경섭(이상 OK금융그룹 읏맨)이 피해자 폭로를 통해 학폭 가해자로 지명됐다. 이들 역시 동료와 후배에게 난폭하고 일방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둘 다 재빨리 사과문을 올린 뒤 “남은 시즌 경기에 뛰지 않겠다”는 ‘셀프 징계’를 내렸다.
선수 사이의 학폭만 문제가 된 게 아니다. 이상열 KB손해보험 감독은 2009년 국가대표팀에서 박철우를 구타했던 사건을 다시 언급했다가 피해자의 분노를 자극했다. 당시 공식 징계를 받았던 사안이지만, 선수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던 배구인이 다시 프로 구단 감독 자리까지 올랐다는 점에서 배구계의 실상이 드러났다. 박철우는 경기 후 수훈선수 인터뷰에서 “이후에도 (이 감독의) 폭력적 성향이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고 들었다”는 증언을 했다. 이 감독은 결국 스스로 잔여 시즌 출전을 포기했다.
#프로야구도 다르지 않은 폭력의 그림자
학폭과 체벌은 스포츠 거의 전 종목에 오랜 시간 뿌리 내린 고질적 폐해다. 너무 많은 선수가 학창시절 맞거나 때려가며 운동을 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선수 인터뷰 때 “어린 시절, 감독 선생님이나 선배 형(혹은 언니)들에게 맞는 게 너무 싫어서 운동을 그만두려다 결국 포기할 수 없어서 다시 돌아왔다”는 고백이 줄을 잇곤 했다. 지금은 그나마 피해자가 피해를 호소할 온라인 공간이라도 활성화됐지만, 과거엔 침묵이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폭력을 필요악으로 여기고 예사로 넘기는 선수도 적지 않았다.
21세기가 벌써 5분의 1이나 지난 2021년에도 그 그림자는 남아 있다. 여전히 수많은 아마추어 종목에서 폭행과 성추행 사건이 벌어진다. 한국 최고 인기 스포츠라 자부하는 프로야구도 다르지 않다. 스카우트들은 ‘실력이 좋지만 학폭 전력이 있는’ 유망주를 뽑아야 할지 말지 여전히 고민한다. 실제로 지난해 신인드래프트에서 상위 라운드에 지명된 선수 중 일부는 고교 시절 야구부 내 학폭 가해자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프로에 입단한다고 팀 내 폭력에서 자유로워지는 건 아니다. 2000년대 후반 감정 기복이 심했던 C 선수가 1군에 올라오면 같은 팀 후배들은 팀 훈련이 끝나도 라커룸에 들어가지 않았다. “괜히 눈에 띄면 무슨 트집이 잡힐지 모른다”는 이유에서다. D 선수는 2군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다”며 마음에 들지 않는 후배의 머리를 야구 배트 손잡이 부분으로 때렸다. 후배는 병원으로 달려가 급히 상처를 봉합했지만, 구단이 “일을 키우지 말자”며 쉬쉬해 오후 경기에 출전했다. 스타플레이어 출신 전직 2군 감독은 종종 선수 따귀를 때리거나 땡볕 아래서 땅에 머리를 박게 하는 단체기합을 줬다. 30대 베테랑 선수도 예외는 없었다. “기강을 잡는다”는 명목 아래 폭력은 감정 분출의 도구로 쓰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폭력에 대한 구단들의 인식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구단들은 예전엔 “다들 맞으면서 운동했다”, “한 명씩 문제 삼다 보면 리그에서 뛸 수 있는 선수가 없다” 등 이유를 들어 사태의 심각성을 축소하는 데 급급했다. 요즘은 “폭력은 어떤 핑계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게 상식이다. 일단 팬들이 ‘때리는 선수’를 용서하지 않는다. 학폭 폭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마다 “징계 수위를 더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최근 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에서 선발된 선수들조차 ‘학폭 가해자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그래픽=백소연 디자이너
#무관용 처벌과 철저한 사실 확인
현재 4대 프로스포츠(야구·축구·배구·농구) 규약에는 현역 선수의 학창시절 학폭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KOVO는 학폭 논란이 불거진 뒤 일단 “앞으로 학교 폭력 및 성범죄에 연루된 신인선수는 드래프트 참여를 원천 봉쇄한다”는 지침을 정했다. 프로야구 역시 신인 드래프트 참가자 전원에게 고교 시절 생활기록부를 의무 제출하게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점점 더 폭력이 스포츠계에서 공식적인 ‘근절 대상 목록’에 오르는 추세다.
다만 신인 선수의 프로리그 진입을 막는 것보다 중요한 건 ‘잘하는 선수’에게도 ‘무관용’ 원칙은 예외가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스타급 선수의 고액 연봉과 인기, 이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과 영향력을 감안해 오히려 ‘잘하는 선수’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가해자가 “어린 마음에”, “철없던 시절의 잘못된 판단으로”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그 폭력이 훗날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분명히 알려줄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선처 없는 학폭 중징계는 그들을 롤 모델 삼아 운동하고 있는 학생 선수들에게도 그 어떤 강의보다 효과적인 교육이 된다.
물론 가해자에게 엄벌을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인터넷과 모바일에 올라오는 폭로 글의 진위를 꼼꼼히 확인하는 것이다. 명백한 증거 혹은 증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더욱 그렇다. 앞서 프로배구의 학폭 폭로가 이어지는 과정에서도 이미 애꿎은 선수가 가해자로 잘못 지목돼 마음고생을 했다. 학폭의 위험성을 일깨우려다 또 다른 ‘억울한 희생자’를 만드는 부작용도 견제할 필요가 있다.
프로야구 10개 구단 단장들은 지난 23일 열린 긴급 실행위원회에서 이와 관련해 “A 선수 파문에 대한 한화 구단의 대응 방식을 참고하자”는 얘기를 나눴다. 한화는 지난 19일 밤 10시쯤 B 씨의 학폭 주장을 확인한 뒤 곧바로 A 선수를 불러 면담했다. A 선수는 B 씨의 이름과 사진을 보고 “누군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폭로 글에 언급한 일들도) 전혀 기억에 없다”고 부인했다. A 선수와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동기생 동료 C 선수도 “나 역시 B 씨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A와는 야구부에서 쉬는 시간을 포함해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했는데 누군가를 괴롭히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러자 한화는 다음달 오전 단장을 비롯한 유관 부서 팀장과 실무자들을 비상 소집했다. 학폭 주장의 정확한 근거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김장백 운영팀장이 B 씨에게 직접 연락해 자세한 상황을 문의했다. 이어 A 선수의 학창시절 담임교사, B 씨가 직접 “과거 일을 증언해줄 수 있다”고 지목한 지인 등과 두루 통화해 사실관계를 파악했다.
그 사이 B 씨는 두 차례 더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려 자신의 기억이 확실하다고 주장했고, 평소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점을 이유로 들면서 “혹시라도 내가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로 안 좋은 생각을 할 경우를 대비해 유서를 적어 몇몇 지인에게 나눠줬다”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적었다. 그러나 이후 한화 구단이 경찰에 B 씨의 신변 보호를 요청하고 네티즌들의 걱정이 쏟아지자 “자살할 생각이 전혀 없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한화 구단에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아리송한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신중을 기하는 한화의 모범답안
결국 B 씨의 학폭 피해 주장 이틀 만인 2월 23일 “구단은 소속 선수 A의 학폭 논란과 관련해 판단을 유보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냈다. 한화 관계자는 “당사자 간 기억이 명확하게 다르고,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될 수 있는 학폭위 개최 사실이 없었다는 점 등에 비춰볼 때 안타깝지만 구단의 권한 범위 내에서는 더 이상 사실관계 입증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고 전했다.
이어 “구단은 피해를 주장하고 있는 분의 일관적인 입장을 충분히 존중한다”면서도 “A 선수 역시 일관되게 ‘누군가를 괴롭힌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구단에 ‘법적 대응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는 의지를 전했다. 따라서 구단은 모든 절차가 마무리될 때까지 판단을 미루되 향후 학폭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무관용 원칙에 따라 엄중한 조치를 하겠다”고 강조했다.
하루 뒤엔 A 선수가 법적 대리인을 선임해 명예회복에 나섰다. 법무법인 린은 “학교폭력의 피해자라고 밝힌 B 씨의 주장은 실체적 사실과 괴리가 상당하다”며 “A는 초등학교 4학년이던 2010년 9월 야구부 활동을 위해 해당 학교로 전학을 갔고, B 씨와 불과 3개월여의 기간만 같은 반이었다. 5, 6학년 때는 같은 반도 아니었고 야구부 훈련으로 인해 일반 학생과 접촉하는 시간은 매우 제한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A는 4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통화를 통해 B 씨가 주장하는 행위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받았다. 당시 친구들, 학교 행정실 관계자, 야구부원, 코치 등을 통해서도 B 씨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재차 확인했다”며 “위 내용과 관련한 자료를 이미 확보해 법률적 검토를 마쳤다. 계속된 허위사실 유포에 관해서는 강력하게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