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한국 싸부’ 모시고 출격
▲ 인도네시아 바둑 국가대표 감독 김동명 7단(왼쪽)과 선수 아룬디나 미란티. |
이날 컨벤션센터 3층 대연회장에서는 세계대회와 함께 경상남도지사배 바둑대회가 동시에 열렸다.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참가하는 대회여서 사람 숫자는 세계대회보다 훨씬 많았는데, 두 대회를 한꺼번에 치르는데도 공간은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대회는 한국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한국 대표는 지난여름 제3회 노사초배 우승자인 이상헌 7단(22). 스위스리그 7라운드, 7전 전승이었다. 우승 후보 중국은 대만 소년에게 발목을 잡혀 3위로 밀려났고, 일본이 준우승을 차지하며 모처럼 체면을 살렸다. 4위는 중국계 미국 대표. 우크라이나의 아르춈 선수(17)가 5위에 오른 것이 우승 못지않은 조명을 받았다. 지난번에 유럽 콩그레스를 얘기하면서 소개했던 유럽의 신진 강호다.
세계대회장 쪽에서는 특별히 눈길을 끄는 선수가 몇 있었다. 전통옷을 입고 나온 남아공 선수와 어린 여성 선수 둘, 그리고 출전자 중 최연소라고 하는 열세 살의 대만 선수. 여성 한 명은 요구르트의 나라 불가리아에서 온 말데노바 막달레나 선수. 열다섯 살의 학생이다. 또 한 명은 인도네시아 대표 아룬디나 미란티. 방년 18세, 키는 작지만 가무잡잡한 피부에 눈망울이 아주 예쁘고 착하게 생겼다.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이다. 실력은 아마 초단. 성적을 기대하지 않았으나 첫날 2연승을 올려 깜짝쇼의 주인공이 되었다. 스위스 리그에서는 승자는 승자끼리 패자는 패자끼리, 승패가 같은 사람끼리 만나게 되어 있어 초반 2연승이 미란티에게는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해 둘째 날은 패점이 많았다. 계속 강자와 상대해야 했던 탓이다. 어쨌든 2승이라도 기대 이상의 전과였고, 결과는 54등이었다. 14명이나 깔았으니 실제로도 대단한 것.
그런데 사람들이 크게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미란티 선수와 동행한 인도네시아 팀의 임원이 한국 사람이었다. 한국에서 프로기사로 활동했던 사람, 김동명 7단이었다. 1947년생으로 65년 입단. 원로급이다. 젊었을 때 ‘청소년배’ 같은 기전에서 우승도 하는 등 성적을 내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사업으로 눈을 돌려 10여 전에 말레이시아로 날아가 목재사업을 했고, 3년 전에 다시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지금은 자원사업 쪽에 주력하고 있다.
사업을 하지만 바둑을 떠날 수는 없는 일. 틈틈이 교민과 현지인들을 상대로 바둑을 지도했고, 그게 알려지면서 지난 8월에는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국가대표 감독’ 임명장을 받았다. 바둑을 둘 줄 모르는데도 바둑에 대해 그 나름의 이해와 애정을 갖고 있는 문화부 차관이 그를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있다.
우리나라 프로기사가 외국에 나가 그 나라 대표팀 감독이 된 것은 물론 김 7단이 최초다. 우리 배구 감독이 유럽이나 남미의 어떤 나라 대표 팀을 맡는 것 같은, 구기 종목에서 가끔 보던 일이 바둑에서도 생기고 있는 것.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몇 년 동안 실제 생활을 하면서 현지인들과 사귀고 그 나라의 말과 풍습을 익힌 다음 바둑을 보급하는 것과 ‘어느 날 갑자기’와는 사범에 대한 현지의 신뢰도, 보급 진전 속도와 효과에서 전혀 다르지 않겠는가. 한국기원이나 대한바둑협회도 이런 경우 적극 후원해야 될 것 같은데, 현실은 좀 다른 모양이다. 김 7단은 이미 은퇴한 프로기사라는 이유로 지원받는 게 아직 전혀 없다는 것. 김 7단은 이번에 미란티뿐 아니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등 인근 나라 선수들 모두의 후견인 노릇을 했다.
김 7단이 수제자로 키우고 있는 미란티 선수는 아버지가 군인. 영관급이다. 부모라면 예외가 없겠지만 미란티의 아버지도 딸에 대해서는 지극정성, 딸의 방 창문에 권총을 그려 놓았단다. 절대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
대회는 성공적이었다. 한두 가지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장소가 아무리 넓다 해도 두 대회를 한 군데서 치르다보니, 더구나 어린이들도 많아서 좀 소란했고, 정숙한 맛은 없었으나 수백 명이 북적대는 덕분에 말 그대로 성황이었다. 그래도 한쪽에선 대국을 하는데 한쪽에선 시상식을 하느라 마이크로 사람 이름을 요란하게 불러대고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위 사람은…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기에…” 하며 상장 문안을 읽어 내려가는 것 등은 좀 조절할 수 있지 않았을까.
국무총리배인데 국무총리는 보이지 않았고, 경남도지사배인데 도지사도 안 보였고, 창원에서 벌이는 세계적인 축제인데 창원시장도 나타나지 않았다. 개막식은 토요일 오전 10시. 모두 분초를 쪼개 사는 사람들이고, 세상에 바둑보다 중요한 것은 널려 있으니까.
그밖에 재미있는 것은 룩셈부르크 선수가 스물일곱 살의 꾸옹 뉘엔이라는 베트남 청년이라는 사실. 어릴 때 룩셈부르크로 이민을 간 경우다. 아마 초단의 실력. 터키 선수 기라이 에르디(36). 역시 아마 초단 정도인데 직업이 바둑교사다. “제자가 80명. 바둑 지도만으로 생활이 가능하다”고 의욕에 넘쳐 있다. “한국 강자들이 온다면 숙식과 가이드 정도는 책임질 수 있다”면서 눈을 빛냈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