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의 후예’ 바티칸서 신과 맞짱
▲ 정세희는 자신의 성경험이 담긴 책을 출간하고 2004년 화보 쇼케이스에서 파격적인 헤어누드를 선보이는 등 숱한 화제를 뿌렸다. |
부산에서 태어난 정세희는 부산경상대학 방송연예과를 졸업하고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지만 3차 면접에서 아깝게 떨어졌다. 실의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교수님의 권유로 진해 군항제의 벚꽃 미인 대회에 참가했다가 1위에 뽑혔고 이것을 계기로 지방 방송의 리포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때 영화 일을 하던 학교 선배는 그녀에게 배우 일을 제안했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으로 영화 현장이라는 곳에 간 정세희.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찍고 있는 영화가 비디오용 에로 영화인지는 몰랐다. 일반 극영화인데 노출 장면이 조금 많다고 생각했을 뿐. 아무튼 그렇게 첫 영화를 찍었고 강구연 감독의 <미인촌>(1994)은 배우 정세희의 데뷔작이 된다.
1990년대 중반은 에로 비디오 계에서 서서히 스타덤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젖소부인 바람났네>(1995)를 제작한 한시네마타운의 한지일 대표는 한국 에로 비디오 문화에 최초로 스타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그 쌍두마차는 진도희와 정세희였다. 여기에다 ‘9대 애마’인 진주희가 가세하면서 전 세대인 권명은이나 소비아 등과 함께 나름대로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한다.
정세희는 진도희의 반대편에 있었다. 마른 몸의 정세희는 글래머 육체보다는 매력적인 외모와 어떤 ‘필’을 통해 섹슈얼한 느낌을 전달했다. ‘진도희의 가슴’으로 상징되던 당대의 트렌드와는 어긋났지만 정세희는 2000년 이후 에로 여배우의 시조격이나 마찬가지다. 이규영으로 시작해 하소연과 성은으로 마무리되는 미소녀 계보의 근원을 찾아가면 우린 정세희를 만날 수 있다. 이것은 소비아의 중성적 느낌이나 진주희의 원숙미와도 다른, 정세희만의 개성이었다.
하지만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연예인 매춘’을 다룬 어느 TV 시사 프로에 증언자로 등장한 그녀는 모자이크와 음성 변조로 가려진 인터뷰이가 자신이었음을 당당히 밝혔다. “백지 수표를 제안받은 적도 있다”고 폭탄 발언을 하면서 “에로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당당하기에” 공개하는 데 거리낌 없다고 말했다.
이후 그녀는 ‘멀티 섹슈얼 엔터테이너’가 된다. 인터넷 성인 방송의 MC로 활동했고 신문과 인터넷의 저널에 기고하기도 했으며 화보집의 모델이 되었다(2001년엔 바티칸 시티의 성당 앞에서 누드를 찍다가 경찰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파격적인 모바일 화보를 찍기도 했고 잠시 충무로로 진출해 <대한민국 헌법 제1조>(2003)에서 국회의원을 복상사시키는 킬러(?)로 등장하기도 했다.
2004년에 있었던 화보 쇼케이스에서 보여준 전라의 헤어 누드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고, 2005년엔 칸영화제 기간에 열리는 포르노영화제에 참여해 외국의 포르노 배우들과 함께 누드를 찍기도 했다. 가수 데뷔를 준비했던 것도 이때. 하지만 방송을 앞두고 안무 연습도중에 쓰러진 그녀는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다행히 독일에서의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2년 정도의 공백 후에 컴백할 수 있었다.
이후 정세희는 미처 못 했던 가수 활동과 대학 특강 활동, 그리고 사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아이비와 장자연 등에 의해 스폰서 파문이 본격화되자 한동안 2000년에 그녀가 했던 이야기가 회자되기도 했지만 ‘배우 정세희’의 귀환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건, 조금은 안타까운 일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