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통 큰 이미지’ 위해 선거 도울 듯…주가 오른 김종인 ‘체제 지속’ 가능성
3월 25일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 열린 시청역 거점유세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 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 사진=국회사진취재단
#“오(Oh)! LH”
보수야권 서울시장 단일 후보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선택됐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자마자 국민의힘 의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오(Oh)! LH”를 외쳤다. 공정과 정의를 내세우며 집권했던 문재인 정부가 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사건으로 도덕성에 치명타를 맞으면서 정부 출범 이후 단 한 번도 불지 않았던 정권 심판 바람이 나타났고, 심판의 총대를 제1야당이 메야 한다는 민심이 나타난 것이다. 국민의힘 한 초선 의원이 전하는 당 내부의 오 후보 승리 요인 분석이다.
“안철수 대표가 되는 줄 알았다. 지역구에 가도 ‘그냥 안철수로 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LH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파장을 키워갔다. 문재인 정부에 대해 이제야말로 제대로 된 견제구를 던져줘야 한다는 경계심이 발동한 것이다. 이에 3지대가 아니라 제1야당, 그중에서도 극우보수라는 편향성을 극복하고 표 확장을 가져올 중도 성향 후보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 선택의 끝에 오세훈 후보가 서 있었던 거다.”
오세훈 후보 측은 문재인 정부 최대 아킬레스건인 부동산 문제에 집중 포화를 퍼붓는다면 ‘정권 심판론’을 투표일까지 끌고 갈 수 있다 판단하고 있다. 정권 말기 대통령 지지율이 본격적인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을 때 치러진 선거에서 정권 심판론은 어김없이 먹혔다는 것이다.
오세훈 캠프 한 관계자는 “선거는 바람이다. 굳이 오세훈 바람이라고 하지 않아도 지금 야당 바람이 세게 불고 있다. 야권 단일화라는 국민의 기대까지 충족시켰기 때문에 바람은 더 거세지고 있다. 정권에 대한 ‘저항 투표’가 이뤄질 것으로 보여 투표율도 상승하면서 여당 조직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안 철수? 후퇴?
대세론을 최종 승리로 연결시키지 못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이번 일로 입게 된 정치적 충격이 상당히 크다. 내년 대선을 버리고 서울시장으로 체급을 낮추는 비장의 카드를 던졌지만, 이 카드가 먹히지 않으면서 앞길을 잃어버렸다. 정치는 명분인데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마함으로써 내년 대선에 나갈 당위성과 정당성을 찾기 어려워졌다.
초반 승기를 잡았던 추세에 너무 안주하면서 안 후보가 최종 승리를 놓쳤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LH 사태가 오 후보로의 선택에 큰 힘을 미치긴 했지만, 안 후보가 ‘기호 4번’을 고집하지 않고 적정 시점에 국민의힘으로 들어갔다면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 자신이 주도하는 판을 만들겠다는 욕심이 생기면서 국민의힘으로 들어가는 결단을 안 대표는 하지 못했다.
결국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시간벌기 전략에 안철수 대표는 말려들고 말았다. 김 위원장 작전으로 인해 안 대표에 대한 신선미는 점점 떨어졌고, 심지어 피로감까지 생겼다. 그 와중에 본인과 이미지가 상당 부분 겹치는 오세훈 후보가 국민의힘 최종 후보로 선출되면서 안 대표 입지는 더 좁아졌다.
단일화 경선에서 패배, 길을 잃어버린 안 대표는 일단 단일화 과정에서 내뱉은 말을 주워 담으며 ‘통 큰 정치인’ 이미지를 심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안철수 대표가 패할 경우 오 후보를 제대로 돕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있었다. 후보 단일화 작업 막판에 오 후보의 내곡동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한 것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그러나 안 대표는 이러한 예상을 뒤엎는 행보를 실행하며 ‘약속 지키는 착한 안철수’ 이미지로 접근하고 있다. 안 대표는 3월 24일 국민의힘 의원총회에 국민의힘 당색인 붉은색 계열의 넥타이를 매고 깜짝 등장, 밝은 모습으로 국민의힘 의원들과 인사했다. 이 자리에서 안 대표는 “저 안철수는 오세훈 후보를 도와 최선을 다하겠다. 여러분께 드리는 약속이고, 서울시민들께 드리는 약속”이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안 대표는 국민의힘 서울시장 보궐선거 공동선대위원장직도 맡았고, 공식 선거운동 시작 하루 전인 3월 24일 서울시장 후보에서 전격 사퇴했다. 앞뒤 재지 않고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보이려는 의도로 분석된다.
국민의힘 한 의원은 “안 대표와 정치를 같이 해본 사람들은 그에게 신뢰가 안 간다는 비판을 많이 한다. 김종인 위원장도 그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안 대표는 패배 이후 즉각적 승복, 뒤끝 없이 바로 오 후보를 도와주는 행보를 보이면서 신뢰자산을 쌓는 시도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안 대표가 내년 대선에 나갈 명분은 많이 부족해졌지만, 현실론에 기대 대선 가도에 몸을 실을 것이 확실시된다. 보수 야권에 여전히 간판으로 내세울 만한 대선 후보가 부족한 만큼 재기가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안 후보 역시 단일화 경선 패배 직후 재기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입장문을 통해 “새로운 정치로 대한민국을 바꾸겠다는 안철수의 전진은 외롭고 힘들더라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새롭게 옷깃을 여미겠다. 신발 끈도 고쳐 매겠다”고 말했다.
안 대표는 재기를 노리며 보수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로 떠오른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의 연대를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대선 국면에서 윤 전 총장과 연대의 모습을 보이면서, 윤 전 총장 지지를 자신에게로 이전시키는 포석을 둘 것으로 전망된다. 윤 전 총장이 정치 초보인 만큼 기나긴 대선 레이스에서 중도 낙마할 가능성도 커 언제든지 자신에게도 기회가 열린다는 생각을 안 대표 측은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선거운동 첫날인 3월 25일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왼쪽)와 함께 선거유세에 나선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사진=국회사진취재단
#지옥에서 벗어난 국민의힘
서울시장 보수야권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국민의힘은 지옥문 앞까지 갔다 살아 돌아왔다. 제1야당이 3석을 가진 국민의당 후보에게 밀리며 야권 정계개편의 제물이 될 뻔했던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내년 대선을 민주당과 양자 대결로 치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또 당을 이탈해 정계개편을 시도하는 원심력도 확실히 막아냈다. 이제 확실히 중심을 잡고 구심력을 갖추면서 대선을 준비할 수 있게 됐다.
김종인 위원장은 “절대 아니다”라고 하지만 김종인 체제가 지속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어차피 새로 뽑을 당대표는 내년 대선을 관리하는 역할인데, 이번 경선 과정에서도 증명했듯 “김종인만 한 관리자가 있느냐”는 것이다. 다가오는 전당대회에서 ‘한 번 더 김종인’ 목소리가 나온다면 그가 당 대표가 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김종인 위원장이 당대표를 하지 않더라도 그가 국민의힘을 다시 일으킨 주역으로서 당 외부에서 ‘상왕 정치’를 할 수도 있다.
어떤 형태로든 김 위원장 힘이 유지될 수밖에 없는 형국이라면, 당 안팎 대선 잠룡들의 세력 지형에도 변동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윤석열 전 총장은 제3지대가 아닌 국민의힘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압력을 느낄 것으로 관측된다. 안철수 대표의 패배로 제3지대 면적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김종인 위원장과 계속해서 날을 세워온 홍준표 의원은 복당이 어려워지면서 대선 가도에 빨간불이 켜졌다. 김 위원장 퇴진을 공개 요구했던 김무성 전 의원도 ‘대선 킹 메이커’로서 역할에 제약을 받게 됐다.
반면 유승민 전 의원은 의외의 수확을 올렸다는 분석이 있다. 오세훈 후보 등장으로 수도권에서 인지도가 높고 중도지대로 확장성이 있는 유연한 보수 후보에 대한 수요가 확인된 것이다. 더욱이 경제를 강조하는 김종인 위원장의 영향력이 계속된다면 유 전 의원 같은 경제 전문가 후보에 대한 발탁 필요성을 김 위원장이 제기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강민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