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이 남긴 거액 유산 비밀 밝혀달라’
신한은행 창업에 기여했던 재일교포가 박 여인 앞으로 남겨둔 거액의 자금과 관련된 얘기는 한때 과거 정권으로의 ‘천문학적 비자금 유입’ 의혹까지 제기되며 회자된 바 있지만 당사자인 박 여인이 직접 소송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적잖은 파문을 예고하고 있다.
자신 명의 계좌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차례에 걸쳐 거액이 출금되었고, 그 돈이 타인에게 송금되는 등 불법적으로 처분됐다는 의혹을 제기한 박 여인은 “이번 소송을 통해 고인이 내게 남겨놓은 재산의 실체가 밝혀지기를 바라며, 고인의 유지에 따라 이 돈이 청소년 인재육성과 조국발전을 위해 요긴하게 사용되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박 여인은 신한은행 측의 재산은닉 및 불법처분 의혹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제보자의 증언과 더불어 관련 문서들을 증거자료로 제출해 소송 결과에 벌써부터 관심이 쏠리고 있다.
11월 23일 기자와 만난 박 여인의 법률대리인 윤찬섭 변호사는 “지고 이기는 문제를 떠나 수사를 통해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생각에 무료로 사건을 수임하게 됐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그는 금액이 워낙 크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허무맹랑한 소송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르지만 박 여인의 상황과 여러 증언 등 모든 정황을 파악해본 결과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윤 변호사는 고소 배경에 대해 “박 여인의 일방적인 주장에 의한 것이 아니다. 2009년 6월 30일부터 2010년 4월 30일까지 박 여인 명의의 신한은행 계좌에서 11회에 걸쳐 거액이 출금됐고, 이 과정에서 박 여인 명의의 위조된 문서가 이용됐다는 신한은행 내부자의 제보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 명의로 개설되어 거래된 다수의 계좌내역과 예금지급확약서, 예금지급결의서 등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도 확보했다. 이 문서들에 이백순 행장의 전자직인이 찍혀 있는 것을 근거로 이 행장에 대한 고소를 우선 진행하게 됐다”고 밝혔다.
▲ 이백순 은행장. |
그렇다면 박 여인이 문제삼는 사건은 대체 어떤 것일까. 소장에 따르면 박 여인은 신한은행 창립과정에 기여한 재일교포 A 씨와 1979년부터 그가 사망할 무렵까지 동거했다. 금융업과 호텔업 등에 종사하며 재산을 모은 A 씨는 신한은행 창립과정에 많은 자금을 투자했으나 1986년 11월 일본에서 돌연 사망했다. 생전에 A 씨는 주식과 예금 등 일부를 동거녀인 박 여인 명의로 해둔 다음 이에 대한 공증 유언장을 신한은행 대여금고에 보관해뒀다고 한다.
박 여인에 따르면 A 씨는 자신의 사후에도 박 여인이 그 재산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특수 인감도장을 새겨주고 비밀번호를 일러주었다고 한다. 박 여인은 생전에 A 씨가 “당신 형제자매 7명이 먹고 쓰기에는 충분하다”는 말을 해왔던 터라 적잖은 액수가 입금되어 있을 것이라고 짐작만 했다고 한다. A 씨가 사망한 이후인 1991년 A 씨의 동생이 찾아와 ‘박 여인 명의로 남겨진 돈’에 대해 언급하기 전까지도 박 여인은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2005년 1월경 박 여인은 자신 명의의 신한은행 계좌에 거액이 입금되어 있다는 제보를 받게 된다. 이에 박 여인은 당시 신한금융지주회사 라응찬 회장의 지인 두 명을 통해 잔고확인을 부탁하게 되고, 이들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전해듣게 된다. 라 회장이 말하길 “박 여인 명의 계좌 잔고가 약 23조 원이며, 포기각서 등 서류를 갖춰주면 예금 일부를 지급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런 취지가 적힌 메모를 전달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 여인은 A 씨의 동생들과 함께 대응할 생각으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 무렵 박 여인은 A 씨가 자신 명의로 사용하던 신한은행 대여금고를 열어보고자 했으나 은행 측으로부터 “본점 이전 과정에서 이해관계인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폐쇄됐다. 그 안에 보관되어 있던 공증유언장도 찾을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이에 대해 윤 변호사는 “금융기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업무처리방식이다. 심지어 당시 대여금고 담당 여직원은 박 여인의 많은 주식이 양도됐다며 그 양수인의 인적사항을 가르쳐 달라는 말까지 했다”며 은행 측의 대응방식에 의혹을 제기했다.
그후에도 박 여인이 자기 명의 계좌에 들어있는 자금과 그 행방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전직 고위공직자 등이 찾아와 그녀의 신한은행 계좌에 대해 언급했으며 신한은행으로부터 돈을 찾아주겠다고 제의하며 위임장과 인감증명서, 포기각서 등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2007년 6월 신한은행 내부자의 제보였다. 박 여인은 내부자로부터 그녀 명의 계좌에 총 97조 원이 입금되어 있다는 말과 함께 일부 계좌 내역을 전달받게 된다.
▲ 신한은행 내부 제보자가 증거로 제시한 박 여인 계좌의 예금 지급 확약서와 결의서에 이백순 은행장의 전자직인이 보인다(원 안). |
가장 큰 문제는 2009년에서 2010년에 걸쳐 박 여인의 명의 계좌에서 거액이 출금됐다는 증언이었다. 실제로 내부자가 제공한 자료를 확인한 결과 박 여인 명의의 계좌에서는 2009년 6월 30일 5000억 원, 10월 1일 2조 5000억 원 등이 박 여인 명의 수령증을 갖추고 출금된 것으로 나와 있다. 또 2010년 2월에도 수차례에 걸쳐 100억 달러씩 타인에게 송금되는 등 출금기록이 있는데 각 송금번호까지 나와 있었다.
제보자는 송금되는 과정에서 박 여인 명의의 협의서와 동의서 등이 갖춰졌으며 도장과 신분증도 제시됐다는 구체적인 설명도 덧붙였다고 한다. 제보자는 또 “라응찬이 신한은행장으로 취임한 1991년경부터 직원 4명이 거액의 대가를 받기로 하고 박 여인 명의의 자금을 비밀리에 전담 관리해왔는데 그들은 심적 부담을 느낀 나머지 2010년 2~3월경 모두 퇴직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박 여인 측은 제보자로부터 출금과 관련된 문서인 이 행장 명의의 예금지급확약서와 예금지급결의서를 제공받았다며 이를 법정증거로 제시했다. 확인결과 이 행장의 전자직인이 찍힌 예금지급확약서에는 “신한은행은 수급자(박 여인)에게 현재 예금의 일부 금액을 신한은행이 지정하는 계좌로 지급을 확약하는 바입니다”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또 타인에게 거금이 지급된 기록 등이 명시된 이 행장 명의의 예금지급결의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박 여인 측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신한은행은 A 씨가 동거녀였던 박 여인 앞으로 남겨둔 거액의 재산을 본인 동의없이 타인에게 송금하는 등 임의로 처분한 셈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박 여인 본인은 알지 못하는 수령증과 동의서 등이 제시됐다면 엄연한 불법을 자행한 것으로 그 자금이 당사자 몰래 유출된 이유와 과정에 대한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박 여인 계좌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일들은 과연 사실일까. 또 박 여인을 찾아와 비밀계좌에 대해 언급했던 이들과 내부자의 제보, 증거자료들은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우선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박 여인이 제보자로부터 건네받은 자료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에 윤 변호사는 9월 14일 이 행장에게 예금지급확약서 등의 진위 여부와 그 내용을 확인해달라는 내용증명을 보냈다. 하지만 이 행장으로부터는 아무 답변도 받지 못했고, 다만 신한은행 직원으로부터 “우리는 답변할 의무가 없다”는 전화만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윤 변호사는 “예금지급 확약서가 진짜가 아니라면 이에 대해 답변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나. 전자서명은 쉽게 위조될 수 없다고 한다. 이 행장이 그 무렵 사용하고 있던 전자서명과 비교해본다면 위조 여부를 가릴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는 의견을 보였다.
박 여인 측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신한은행 측은 “금액의 크기를 떠나 금융기관에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박 씨의 주장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혀 근거없는 주장으로 박 씨가 언급한 모든 서류는 양식에도 맞지 않는, 한마디로 100% 조작된 것이다. 현재 우리 회사의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11월 25일 기자와 만난 신한은행 관계자는 10월 29일 금융감독원 측에 보낸 답변서를 토대로 박 여인의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 관계자는 “우선 A 씨라는 인물이 존재했다는 것은 확인됐으나 신한은행 창립에 기여한 주요 40여 명의 명단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체조사결과 A 씨가 박 씨 명의로 개설한 계좌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행에 기록된 박 씨의 최초 계좌개설 연도는 1990년이었다. 따라서 1986년 사망한 A 씨가 생전에 박 씨 앞으로 계좌를 개설했으며 계좌에 들어있는 돈을 은행 측이 임의·불법적으로 인출해 처분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또 박 씨 측에서 증거로 내세운 내부 제보자의 증언 및 관련 문건에 대해서도 “내부자가 거론했다는 13개의 계좌 중 12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계좌로 따라서 모든 거래내역서도 위조된 것이다. 또 이 행장의 전자직인이 들어있는 예금지급확약서는 은행에서 사용하지 않는 양식으로 개인금융거래에 있어 그런 확약서를 발행하는 경우는 없다”고 일축했다.
대여금고 부분에 대해서도 이 관계자는 “A 씨에 대한 인적사항이 전무해 대여금고가 확인되지 않았다. 설령 확인할 수 있다 해도 은행 측에서 A 씨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 및 관계를 입증하지 못하는 박 씨에게 정보를 제공할 의무도 없으며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원칙”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어 “박 씨가 근거없는 주장을 하고 소송까지 진행함으로써 사실 여부를 떠나 회사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됐다. 현재 회사 차원에서 법적 대응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3부에 배당된 상태로 검찰은 조만간 고소건에 대한 수사를 진행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