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소자들 “월 100만원 내면서 얻어맞고 굶주리며 강제노역…40km 거리 ‘서생크탈출’ 꿈꿔”
2020년 5월 청학동 서당에서 탈출하듯 퇴소한 학생 A 군의 말이다. 2020년 2월 청학동 한 서당에서 남학생들에게 체액을 먹이는 등 상습적인 동성 간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다. 이들 남학생들은 성폭행 외에도 엽기적인 수준으로 괴롭히고 상습 구타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A 군은 2019년 11월부터 5월까지 약 6개월 정도 생활하다 청학동 서당을 나왔다.
경남 하동군 청학동 한 서당 입구. 해당 서당은 최근 학생간 폭력 문제가 발생했다. 사진=연합뉴스
이런 피해를 입은 것은 A 군뿐만이 아니다. A 군처럼 피해를 드러내고 법적 대응을 준비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기억하는 것조차 괴로워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예절을 가르친다는 청학동 서당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곳은 지옥이 됐을까. 한 서당만이 아니라 여러 서당에서 다양한 피해자들이 피해를 호소하고 있는데 그 사례는 청소 솔을 목구멍까지 쑤셔 넣거나, 항문에 도구를 집어 넣는 등 엽기 그 자체다. 일요신문이 청학동 서당에 거주했던 학생들에게 그 자세한 얘기를 들어봤다.
경남 하동 지리산 청학동 서당은 약 8개가 운영 중이다. 흔히 서당에서는 ‘훈장님’이 한문을 가르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피해자들 얘기를 종합해보면 우리가 생각했던 훈장이 존재하는 곳이 소수이고 대다수는 교육과 무관한 이가 원장이 된다.
B 군은 학생들에게 폭행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B 군은 서당을 떠올리자 진절머리를 쳤다. 서당 생활, 서당 원장과 선생의 폭력, 노역 생활 등으로 인해 그때를 생각하기도 싫어했다. B 군은 “교육을 받은 건 없다고 보면 된다. 4년 동안 배운 게 영어 단어 몇 개, 사자성어 몇 개가 전부다”라면서 “선생들은 자질이 없고 교육에 관심이 없다. 그냥 학생을 돈으로만 본다”라고 말했다. 서당에서 학생들은 돈이다. 서당마다 다르지만 학생들은 한 달에 80만 원에서 120만 원 정도를 낸다. 이 외에도 축구 경기가 있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한 달에 몇 차례 5만 원씩 낸다.
학생들은 한 달에 약 100만 원을 내지만 제대로 못 먹었고 노역에도 동원됐다. C 군은 “너무 배고프다. 배고픈 게 가장 큰 고통이다. 고기 반찬이 나온 게 6개월 동안 3번 정도 됐던 것 같다”면서 “밥, 김치, 국이 거의 전부라 다들 배고파했다. 너무 배고파서 몰래 서당 부식창고를 털기도 했다. 단백질이 부족해서인지 애들 발육에도 문제가 있었다. 어떤 친구는 도망쳤다가 다시 왔는데 원 없이 먹고 왔기 때문인지 그 사이 키가 눈에 띄게 커져 있었다”고 말했다.
B 군은 더 충격적인 얘기를 꺼냈다. B 군은 “어느 날은 길고양이가 임신했다면서 서당에서 생선을 구워줬다. 너무 열받았다. 우린 고기 반찬은 구경도 못하고 배가 고파 죽겠는데, 길고양이보다 못한 취급 받는 것 같았다. 너무 배고파, 고양이가 먹기 전에 그 생선을 몇 명이서 빼앗아 먹었다. 아직도 퇴소자들끼리 서당 욕하면서 그때 생선 얘기를 하곤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노역에도 투입됐다. 여학생들은 주방에, 남학생들은 공사 현장이나 밭일 등에 투입됐다. C 군은 “학교를 다니는 학생과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으로 둘로 나뉘었다. 기숙사에서 자고 아침 식사를 한 뒤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등교하면 남은 학생들은 방치돼 있거나 노역에 투입됐다”고 설명했다.
A 군 생일을 맞아 서당을 방문한 부모님이 찍은 아들 밥상. A 군은 그날을 몇 개월 만에 고기국이 나온 날로 기억했다. 사진=A 군 보호자 제공
이어 C 군은 “지난해 2층집을 부수고 새로 짓는 공사를 했다. 최소한의 인부 한두 명만 부르고 나머지는 학생들이 다 지었다. 소위 ‘오함마’라 불리는 망치와 연장을 들고 다 부순 다음 지시에 따라 지었다. 가스, 수도, 전기만 빼면 우리가 다 했다. 지으면서도 도대체 돈 주고 와서 이걸 우리가 왜 하나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C 군은 “도대체 왜 우리가 하냐고 말하면 폭력으로 돌아왔다. 한번은 원장이 ‘이거 다 짓고 나중에 너희도 애를 낳고 여기 다시 와서 ‘이거 내가 지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뿌듯하겠냐’고 말했다. 나는 ‘여길 왜 오냐. 다시는 안 온다’고 속으로 생각했다”고 분노를 토했다.
김장철에는 여학생들을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김치 만드는 데 투입시켰다. 나물을 기르는 등 크고 작은 작업이 많았다. C 군은 “나물 재배 작업에 투입됐다가 관리가 안 돼 다 죽은 적이 있었다. 그날도 폭행이 있었다”고 말했다.
서당 원장과 선생의 폭력도 지속적으로 행해졌다. B 군은 “우리끼리는 ‘번개탄’이라고 불렀다. 원장이 손날로 관자놀이 쪽을 딱 때리면 귀에 이명이 생기면서 앞이 안보인다. 그렇게 번개탄을 맞고 정신이 없을 때 귀싸대기를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한다. 말에 토를 단다는 등 별 이유도 아닌 것으로 흔하게 때려댔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D 양은 “남학생에 비하면 여학생에게 폭력은 약했다. 그래도 고문 수준으로 기마자세를 몇 시간씩이나 수차례 시키거나 주먹으로 초등생 머리를 가격하기도 했다. 아무 이유 없이 연속으로 ‘딱밤’을 수차례 때리는 등 폭행이 상습적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학생들은 어떤 계기로 서당에 입소했을까. 일부 누리꾼들은 댓글로 “거기 애들은 부모가 버린 거다”라고 했지만 사실과는 달랐다. 일단 생활비로 한 달에 100만 원 이상 내야 하기 때문에 ‘방치’ ‘무관심’과는 거리가 멀다.
이유는 다양했다. 애를 돌볼 시간이 없는 맞벌이 부부가 서당 광고를 보고 보내거나, 일종의 ‘대안학교’로 인식해 지리산 자연 속에서 뛰어놀길 바라는 마음에서 보내기도 했다. 일부는 어린 나이에 사고를 쳐서 예절교육을 받기 위해 보내지기도 했다.
원장들은 학생을 받으면 “몇 년이고 자연 속에 있으면서 마음 수련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학생이 “너무 힘들다. 집에 가고 싶다”고 하면 부모들은 대부분 투정으로 인식했다. 원장도 “지금 힘들다고 집으로 가면 그동안 인성 공부했던 게 다 무의미해진다”고 경고했다. 부모들은 아이들 속이 곪는 것도 모르고 그곳에 기대야 했다.
심지어 학생이 부모에게 전화할 때는 서당 관계자가 옆에서 그 내용을 들어야 한다는 걸 규율로 명시해 놓기도 했다. 학생들은 “서당 측에서는 ‘무엇이 불편한지 들어야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내부고발을 하지 못하도록 지키고 서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학생들은 ‘군대도 1년 6개월이면 끝나는데 이곳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10년도 더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끝나지 않는 지옥 같다는 생각이 가장 큰 스트레스다”라고 입을 모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몇몇 학생들은 최후의 선택으로 도망을 치기도 한다. 경남 하동 서당에서 산청군까지는 40km 정도다. 학생들은 틈나는 대로 몰래 빠져나와 그곳까지 걸어서 도망친다.
서당은 경보 장치를 달아놓고 학생들의 도망을 막으려 한다. 또한 마을 방범대를 설치해 한 서당에서 도망이 발생하면 다같이 잡으러 다니기도 한다. 서당에서 산청까지 가는 길을 수색하거나 산청 버스터미널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탈 때 잡아내기도 한다. 이들의 예상 동선이나 평소에 어디로 가고 싶다고 말했던 것들을 알아내 추적한다.
B 군은 “원장이 하루는 자랑처럼 ‘제주도에서도 한 명 잡아 온 적이 있다’고 말했다”며 기억했다. 그렇게 도망에 성공해 집에 가더라도 대부분은 서당으로 돌려보내진다. 그래도 또 도망을 시도한다. B 군은 “내가 4년간 서당에 있을 때 도망을 목격한 게 70~80건은 된다. 나도 시도했지만 결의하는 날 잡혔다. 서당은 사실상 수용소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A 군은 “서당에서 창문을 뚫고 도망친다는 보도에 ‘서당 가기 전 도둑질을 해봤으니 창문을 떼고 도망을 갔지’라는 댓글을 봤다. 분통이 터진다. 도둑질 경험 때문에 아닌, 공사 현장에서 창문을 달아봤으니까 떼는 건 식은 죽 먹기인 거다”라고 말했다.
일요신문이 만난 서당 출신 학생들에 따르면 서당에서 학교폭력이 엽기적인 수준까지 올라가게 된 건 선생 등 위에서의 폭력과 아무도 제동을 걸어주지 않는 내부 환경 때문이라고 봤다. D 양은 “아이들은 때리고 맞는 걸 보면서 자란다. 그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몇 년이고 방치된다. 아무리 부모님에게 보내 달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부모님이 보고 싶어도 방학 때 잠깐 뿐이다. 애들이 점점 이상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A 군은 십자인대가 완전히 파열되면서 서당을 나오게 됐다. 사진=A 군 제공
이들은 어떻게 이곳을 탈출할 수 있었을까. 충격적인 동성 간 성폭행을 당한 A 군도 학교 폭력 때문에 퇴소한 게 아니었다. A 군은 “서당 버스 정원보다 학생이 약 10명이 더 많아 덩치가 큰 초등학생을 무릎에 안고 버스를 타야 했다. 그런데 길이 고르지 않아 안고 있던 아이가 붕 떴다 떨어지면서 십자인대가 파열됐다”면서 “아프다고 소리 지르고 병원에 보내달라고 해도 원장은 ‘엄살 부리지 말라’며 ‘번개탄’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이어 A 군은 “10일쯤 지나 무릎이 두 배가 될 정도로 부은 뒤에야 보건소에 갔다. 의사는 ‘왜 이제 왔냐’며 ‘치료가 너무 늦어져 잘못될 수도 있으니 곧바로 병원으로 가라고 하더라. 재활 치료를 오래 해야 할 상황이 되자 그제야 서당은 ‘퇴소 조치’를 취했다. 그렇게 그곳을 나오게 됐다”고 회상했다.
B 군은 “방학 때 잠시 집으로 온 날 ‘말썽 안 부리고 정말 잘하겠다’, ‘같이 살고 싶다’고 어머니에게 호소했다. 그렇게 나오게 됐다. 나중에 부모님이 서당의 실체를 알고 나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알았다. 원장에게 망치 손잡이 부분으로 머리를 맞은 적이 있는데 그 이후 머리가 자꾸 붓는 증상이 있다. 부모님은 병원 진단을 받아 고소하자는 입장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서당을 나오게 된 뒤에도 그곳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애들은 틱장애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증세로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A 군은 “수면제와 우울증 약을 달고 산다. 하루에도 30번 이상 그때 생각이 나면서 몸이 굳는다.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고 돌아다니기도 어렵다. (기자를 만난) 오늘이 몇 달 만에 밖으로 나온 날이다. 학업에 집중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고 고통스러워했다.
이들은 서당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끔찍했던 기억 때문에 관계가 소원해진 경우가 많아 친구가 거의 없었다. C 군은 “오래 전 번호를 뒤져 서당 친구에게 같이 고소하자고 하면 ‘그때 생각은 하기도 싫다. 그런 말 하지 말라’며 버럭 화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토로했다.
한편 일요신문은 위에서 언급된 서당들의 정확한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수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했으나 모두 연락이 닿지 않았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