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임생 “다양한 방법으로 스포츠 교류 이어지길”…이태홍 “북한 7번 정만이 꼭 한 번 만나고 싶다”
남북한은 국제대회 등에서 종종 서로 상대해왔지만 단일팀 결성은 1991 U-20 월드컵 대회가 유일했다. 2022 카타르월드컵 2차 예선에서 적으로 만난 남북한 7번 손흥민(왼쪽)과 한광성(오른쪽). 사진=대한축구협회
동서 냉전시대가 ‘해빙’ 분위기로 흘러가던 1990년대 초반 남북한 사이에도 화해 무드가 무르익었다. 1991년 4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에서 먼저 단일팀이 결성됐다. 현정화, 리분희 등으로 구성된 단일팀은 단체전에서 중국을 꺾고 우승을 이뤄냈다.
축구계도 단일팀 결성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1991년 6월은 U-20 월드컵 개최가 예정돼 있었다. 앞서 1990년 열린 아시아 예선에서 남북은 결승에서 만나 나란히 1, 2위로 본선에 진출한 바 있었다. 당시 결승은 0-0으로 무승부를 기록, 승부차기(4-3 남한 승) 끝에 남한이 1위에 올랐다.
결국 국제축구연맹(FIFA)의 승인이 떨어지며 단일팀 결성이 확정됐다. 하지만 선수들에겐 당황스러운 결정이었다. 주장 완장을 달고 1991년 대회에 나섰던 이태홍 현 대구대 감독은 “처음 이야기가 오간다는 뉴스를 보며 ‘설마’했다. 당연히 대회를 나서는 당사자인 선수들과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웃었다.
대회 엔트리는 18명이지만 남북이 절반씩 참여해야 했기에 참가할 수 있는 남한 선수들은 9명으로 줄었다. 예선 과정을 함께했던 선수들은 섭섭함이 앞섰다. 수비수로 대회에 참가한 이임생 전 수원 삼성 감독은 “같이 고생했는데 본선에는 서지 못하는 선수들이 발생해 안타까웠다”고 회상했다.
이태홍 감독도 “처음엔 반감이 앞섰다. 정치권 놀음에 선수들만 희생양이 되는 꼴 아닌가”라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북한에 가볼 수 있다는 점은 설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도 있는데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북한에 가볼 기회가 적지 않나”라며 웃었다.
축구에서 처음 결성된 남북 단일팀, 모든 것을 남과 북이 반반으로 나눴다. 이태홍 감독은 “어린 선수였기에 정확한 과정은 알 수 없지만 선수단을 결성하는 과정은 남쪽에서 단장을 맡았으니 북한이 감독직을 맡았다. 그러다 보니 주장은 내가 하게 됐다. 그때 선수단 중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았다”고 말했다.
엔트리 구성도 남한 9명, 북한 9명이었다. 심지어 경기에 뛰는 인원도 한쪽이 6명을 넘기면 안 됐다. 이태홍 감독은 “대회 때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포르투갈 전에서는 골키퍼를 교체했는데, 부상이나 다른 이유가 아닌 남북 균형을 맞추려 교체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남한 9명, 북한 9명으로 구성된 당시 단일팀은 아르헨티나에 승리하는 이변을 연출한 끝에 대회 8강에 진출했다. 사진 속 단일팀 7번은 북측 선수 김정만. 사진=연합뉴스
남북 청소년 선수들은 예선 과정에서 만난 경험이 있었기에 어색함은 덜했다. 그런데도 한 팀으로 대회에 나서는 팀원끼리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대회 참가 이전 남북을 오가며 훈련을 했고 이 과정에 참가했던 이태홍 감독은 “모든 날짜를 합하면 서울에서 보름, 평양에서 보름 정도 함께 지냈던 것 같다. 다른 대회에서 만날 땐 같은 호텔을 숙소로 사용해도 교류는 단절돼 있었는데 같은 팀이 되니 훈련 외 시간의 교류도 양쪽 정부 측 인사들이 어느 정도 눈감아줬다”며 “남북이 각각 9명인데 2인 1실로 숙소를 사용해 나와 북한 김정만은 혼자 방을 사용했다. 그래서 김정만과 나는 자유롭게 서로 방을 오가며 더욱 돈독해졌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이태홍 감독은 남북 교류에 ‘주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는 “숙소에서 지낼 때 복도 한가운데에 우리 쪽 안기부나 북한 인사들이 항상 서 있었다. 강하게 제재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이를 지나다니기가 아무래도 눈치가 좀 보이는데 나는 주장이었기에(웃음) 가교 구실을 한다는 명목으로 자유롭게 오갔다”고 말했다.
이임생 감독은 상황이 달랐다. U-20 대표팀 일원인 동시에 1992 바르셀로나올림픽을 준비하는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이에 U-20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을 마친 직후 올림픽 예선에 참여했다가 남북 합동 훈련을 거치지 않고 곧장 U-20 월드컵 본선으로 향했다.
“서울, 평양에서 진행한 훈련에 참여한 선수들만큼은 아니지만 포르투갈에서 북한 선수들을 만나 함께 생활하면서 많이 친해졌던 기억이 난다. 축구 이야기 외에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때면 일대일로 상대해야 했다. 북한 선수가 2명이면 서로 경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화 내용은 그 나이대 관심사였다. ‘여자친구 있나’ 뭐 그런 이야기였다. 북한은 물레방앗간에서 데이트한다기에 좀 놀랐던 기억이 있다(웃음).”
반면 훈련차 북한에 약 보름간 체류했던 이태홍 감독은 ‘평양 방문기’를 풀어놨다. 유독 가깝게 지냈던 김정만과는 외출도 여러 차례 했다고 전했다.
“겁이 없었던 것 같다. 평양에 넘어가기 전에 교육을 받았는데 ‘항상 곁에 따라다니는 인사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내가 평양에서 어딜 가든 길 잃어버릴 걱정은 없다고 생각했다(웃음). 식당이나 편의점 같은 곳을 구경하며 먹을 것도 사 먹고 돌아다녔다.”
남다른 ‘평양투어’를 즐겼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남과 북의 거리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만이가 단둘이 있을 땐 조금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 대동강변에서 낚시를 하거나 출퇴근 시간에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대부분 짜인 각본에 의해 움직인다고 했다. 평양을 방문한 우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면서 “한번은 평양 서커스를 단체로 구경하기로 했는데 일정이 꼬여서 우리가 안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북측에서 ‘꼭 가야 한다’고 해서 2시간을 늦게 갔는데 공연단과 모든 관중이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선 ‘남북이 참 다르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고 설명했다.
이임생 감독은 훈련 과정에서도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축구 용어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패스는 ‘접선’, 헤딩은 ‘머리박기’라고 하는 식이다. 어릴 때였으니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면서 “어쨌든 우리가 북한 쪽에 맞추는 것이 편했다. 웃음은 나오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까”라고 말했다.
대회 본선에서는 아르헨티나, 아일랜드, 포르투갈을 차례로 만났다. 아르헨티나는 유독 U-20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축구 강국, 대회 개최국 포르투갈은 훗날 슈퍼스타로 성장한 루이스 피구, 루이 코스타 등 ‘황금 세대’로 구성된 팀이었다.
이에 이태홍 감독은 “솔직히 말하면 성적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았다. 급하게 구성된 팀이기에 조직력이 좋지 못하다고 느껴졌다. 단일팀으로 참가한다는 데 의의를 두고 대회를 즐기다 오자는 생각이었다”고 털어놨다. 이임생 감독은 “조직력은 몰라도 포르투갈에 미리 들어가서 함께 생활하며 어느 정도 선수 간 끈끈함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선수들 개인의 동기부여는 컸다. ‘물론 어렵지만 불가능한 승부는 아니다’라고 서로 격려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단일팀은 첫 경기 아르헨티나 전에서 1-0으로 승리했다. 아일랜드를 상대로도 후반 막판 극적인 골로 무승부를 거둬 승점을 따냈다. 대회 우승을 차지했던 포르투갈에는 패했지만 이들이 3승을 거둬주며 단일팀은 1승 1무 1패로 8강에 진출했다. 이태홍 감독은 “성적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았지만 막상 경기에 돌입하니 선수들이 너무 잘해줬다. 조직력이 어찌 됐든 선수들의 의지가 살아났다고 본다. 개개인의 전투력이 강했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우리를 얕본 것인지 경기 전에 몸을 풀러 나오지도 않았다”며 기억을 떠올렸다. 조별리그 통과로 단일팀은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결국 이들의 도전은 8강에서 브라질을 만나며 마무리됐다.
두 감독은 경기 외에도 대회 기간 중 포르투갈 현지에서 북한 선수들과 우정을 나눴던 기억을 전하기도 했다. 휴식일 등 시간이 날 때면 숙소 주변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임생 감독은 “북한 선수들의 주머니 사정이 좋지 못해 좋은 곳은 가지 못했다. 시장에 가서 우리가 북한 선수들이 필요한 물건을 사주는 식이었다. 북한에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선물한다기에 시계를 많이 사줬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이는 다시 한 번 남북한의 거리감을 느끼는 계기가 됐다. 이태홍 감독은 “그때 세탁비 명목으로 팀에서 일주일에 선수들에게 100달러씩 나눠줬다. 당시로선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런데도 북한 선수들은 돈이 없었다. 다시 그 돈을 거둬갔다고 하더라. 그래서 주로 우리가 북한 선수들에게 이것저것 물건을 많이 사줬고 나는 나중에 북한에 가서 쓰라고 그냥 돈을 줬다. 100달러짜리는 단위가 커서 못쓴다기에 1달러짜리로 바꿔서 줬다”고 전했다.
남북한을 오가는 훈련, 포르투갈에서 훈련과 대회 기간까지 약 2개월의 시간을 함께 보낸 이들이 다시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임생 감독은 이후로도 인연이 닿지 않아 북한 선수들과 교류하지 못했다. 그와 달리 이태홍 감독은 이따금 일부 선수들을 만나거나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1994 미국월드컵 예선을 도하에서 치렀는데 그때 북한도 함께 참가했다. 거기서 북한 감독 선생님을 다시 만나 인사를 드렸고 성인 대표가 된 정만이도 다시 만났다. 1999년 은퇴를 앞두고선 중국리그에 진출하려 중국 쿤밍에 갔었는데 거기서 U-20 월드컵 멤버를 만나기도 했다.”
남북 단일팀을 꾸려 세계대회에 호기롭게 나섰던 20세 어린 선수들은 어느덧 50대 지도자가 됐다. 이들은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30년이 된 줄은 모르고 있었다. 덕분에 그때 기억을 오랜만에 꺼냈다”고 입을 모았다.
이임생 감독은 “앞으로도 남북 체육 교류가 이어지길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이임생 감독은 “이전에도 이후로도 단일팀은 다시 결성되지 않았다”면서 “물론 요즘 젊은 세대들은 남북관계에 관심이 적지만 여전히 이산가족 문제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스포츠 교류를 통해 정치적으로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남북관계가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다양한 방법으로 교류가 이어지질 조심스레 기대해본다”고 말했다.
북한 선수들과 교류가 더 많았던 이태홍 감독이지만 단일팀 재결성은 반대 뜻을 명확히 했다. “평창올림픽 때 (단일팀 결성이) 반갑기도 했지만 경험을 해본 사람으로서 반감이 들기도 했다. 선수들이 괜한 희생양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면서도 “다른 차원의 남북 체육 교류는 좋다고 본다. 단일팀 같은 이벤트성 교류는 반대다. 하부리그라도 팀 간 교류 등 지속적인 방향으로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그러면서 유독 정을 나눴던 김정만을 향한 그리움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다른 것보다도 정만이를 한 번 만났으면 한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저 만나서 공 한 번 같이 차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다”고 말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